1987년 ‘수지 김 살해사건’ 발생 당시 최광수(崔侊洙ㆍ66) 외무부 장관이 직접 이장춘(李長春ㆍ61) 당시 주(駐)싱가포르 대사에게 윤태식(尹泰植ㆍ43ㆍ구속)씨의 납치미수극 기자회견 주선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최 전 장관은 또 이 전 대사가 “윤씨의 납치미수극 주장을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을 열지 않자 수 차례에 걸쳐 기자회견 주선을 종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 이었던 권모(63)씨가 지난 주말 검찰에 보낸 서면진술서를 통해 확인됐다. 권씨는 지금까지 현지 대사관에 윤씨의 기자회견을 종용한 장본인으로 알려졌었다.
권씨는 이 서면진술서에서 “본인은 최 전 장관의 지시를 따랐을 뿐 정확한 진상을 몰랐다”며 혐의를 부인한 뒤 “당시 싱가포르 대사관에 윤씨의 현지 기자회견을 주선하라는 훈령을 보내도록 지시한 사람은 최 전 장관”이라고 주장했다.
권씨는 이어 “최 전 장관은 이 전 대사가 ‘납북미수 사건이 아니라 자진월북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며 기자회견을 열지 않자 수 차례에 걸쳐 거듭 기자회견 주선을 종용했다”며 “본인은 장관의 지시를 이 전 대사에게 전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에 따라 당시 안기부가 윤씨의 기자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외무부 최고위층에 압력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아 당시 외무부 고위 관계자들도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으면서 안기부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윤씨가 한국대사관을 찾았을 당시 이미 대사관측에서는 자체첩보를 통해 그의 자진월북 기도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당연히 보고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외무부가 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 차례에 걸쳐 고집스럽게 기자회견 주선을 종용한 경위를 파악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 따라 최 전 장관을 직접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나 그가 지난 1998년 외국으로 이민간 상태라 서면조사나 전화조사를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87년 1월 중순께 국제회의 참석차 출국할 예정이었던 이 전 대사가 “출국 전까지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라”는 최 전 장관의 지시를 받은 뒤 갑작스레 국제회의 참석을 포기한 사실을 확인, 이 과정에도 압력이 있었는지 여부도 조사하기로 했다.
한편 서울지검 외사부(박영렬ㆍ朴永烈 부장검사)는 장세동(張世東ㆍ65) 당시 안기부장과 최 전 장관 등의 형사처벌 여부 등을 검토한 뒤 오는 18일 87년 안기부의 ‘수지김 사건’ 은폐 및 지난해 경찰의 수사중단 경위에 대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박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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