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도 끝무렵, 지방에 다녀올 일이 있어 오랜만에 고속버스에 올랐다.서울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던 차에 고속버스 안에서 소설가 이청준의 산문집 '여윈젖가슴'을 펼쳐 들었다.
무심코 마주친 한 구절, "친구로 인해 마음의 누추를 덜게될 때"가 있노라는 작가의 고백이 가슴묵직하게 와 닿았다.
밤 길달려온 친구, 앞마당에 소복이 쌓인 눈 처음 밟으시라 뒷문으로 빠져나와 반기었다는 깊은우정(友情) 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슬며시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정작 소중한것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정말 중요한 것 쉽사리 잊고 사는 자신에 대한 낭패감 탓이었으리.
마음의 누추를 덜게 해주는 이있어 고단한 삶에 퍽이나 위로를 받는다는 소설가에게, 마음의 누추란 깊은 실존적 성찰이 담긴 질박한 표현일 것이나, 어줍지 않은 사회학자의 눈에 들어온 마음의 누추는 우리네 삶의 방식을 비추어주기에 손색이 없는 탁월한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삶 자체가 끊임없이 마음의 누추를 강요하고 있는건 아닌가 해서다.
바야흐로 입시전쟁의 포문이 열렸다. 이 와중에 서울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은 마음의 누추함이 해를 지날수록 더해만 가고 있다.
전국의 대학을 한 줄로 세운 후 1등 서울대부터 수능점수에 따라 학교정원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입시제도 덕분이다.
수험생과 그 가족은 물론이요 이른바 '우수학생 유치'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대학의 자괴감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려는지.
그렇게 어렵사리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아들·딸들이 졸업을 앞두고 사상 유례없는 청년실업의 위기 앞에 서있다.
GNP 대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교육비를 지출해온 부모들의 마음은 차치하고라도, 미래를 향한당당함 대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초조한 얼굴로 서성대는 대학생들의 모습 또한 여간 마음을 누추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모두 젊은 시절을 지나왔건만 한 번도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지못했던 기성세대의 좌절은 어디서 달랠 수 있으려는지.
용(龍)들이 난무하는 요즘의 정치현장도 못지 않게 우리 마음을 초라하게 한다.
"지도자의 수준은 국민이 결정한다" 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늘의 정치 상황을 가져온 책임의 절반은 우리자신에게 있는 셈이다.
치유불능의 지역주의와 그로 인한 불평등의 확대 속에서 깊어만가는 한(恨)의 고리는 어디서 풀수 있으려는지.
이런 세상에서 우리 마음의 누추를 덜어주는 이 있음은 진정 복 중에서도 큰 복인 듯싶다.
올 봄서울 강남구 포이동에 위치한 농아교회를 방문할 일이있었다. 그 곳에서 청각장애인인 담임 목사님을 뵈었다.
목사님 말씀이 최근농아교회에서 가장 공들여 하고 있는 사업은 연변의 한인교회를 도와주는 모금이라셨다.
풍부히 가진 건 없지만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음이 축복임을 굳게 믿고 계신 목사님.
최근 들려오는 소식인 즉, 목사님 월급이 너무 적으니 50%를 올려드리라는 권유를 받고는 교인들이 목사님께 그렇게 해드리겠노라 약속을 드렸더니 극구 사양하시더라는 것이다.
이유인 즉, 당신은 그 월급으로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이제 자녀도다 성장한데다, 무엇보다 교인들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어찌 월급을 올려 받겠느냐셨다는 것이다.
세상살이 고달파 마음이 누추해오면 포이동농아교회 목사님을 떠올리곤 하는데, 한편으로는 마음의 누추를 덜게 되면서도, 자신의 모자람 어리석음에 더욱 초라해지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고 보니 올 한해도 불과 보름 남짓을 남겨두고 있다. 올해 만큼은 내마음의 누추를 덜어준 이들에게 오랜만에 소식한 장 띄워야 할까 보다.
함인희ㆍ이화여대사회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