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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애국주의, 그 불길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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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애국주의, 그 불길한 열정

입력
2001.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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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는 국민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듬직한 버팀목이다.그것은 국민국가 구성원들 개개인에게 귀속감을 부여해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애국주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때, '국민'으로서의 시민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국민국가는 그 존립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국민국가 체제가 여러 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인류를 압도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진화 단계의 표상이라면, 우리는 일정 정도의 애국주의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나침은 흔히 모자람만 못한 것이 세상사의 이치다.

애국주의처럼 합리적 연산보다는 감정상태가 지배적인 사안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국민국가 체제의 지주로서 애국주의가 불가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의 수준으로 묶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고삐 풀린 애국주의는, 또 다른 애국주의와 맞부딪치며, 흔히 전쟁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힘이 약한 나라의 애국주의라면, 그것이 제어되지 않더라도 커다란 해악을 낳지는 않는다.

아무리 결기에 차 있어도 작은 몸통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센 국가의 애국주의는, 그것이 제어되지 않을 때 측량할 수 없는 재난을 불러온다.

문제는 힘센 나라의 시민들이 약한 나라의 시민들보다 애국주의 의유혹에 더 쉽게 빠진다는 것이다.모든 나라에서 애국주의가 융성할때 가장 유리한 것은 가장 힘센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로 자신들의 애국주의가 지닌 그 가공할 파괴력 때문에 애국주의에 쏠리지 않아야 할 더 큰 책임이 있다. 요컨대, 센 주먹은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지금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다. 역사에 존재했던 어떤 제국도 미국만큼 힘의 집중을 누려본 적은 없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에 힘으로 미국을 젖히거나 대등하게 맞설 국민국가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미국 시민들이 다른 어느 나라 시민들보다 더 애국주의의 발현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9ㆍ11 테러사건 이래 미국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는 것같다.

그것이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미국인들이 애국주의의 열정을 자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건물 더미 아래 묻혀버린 수천 동료 시민들의 절규를 생각하면 어떻게 냉정해질 수 있겠는가. 많은 미국인들이 생각하듯, 9ㆍ11사건은 미친 야만인들이 문명세계의 심장에 꽂은 비수일 수도 있다.

그 테러가 미국의 대외 정책과 무관할 수도 있다. 테러리스트로 지목된 개인이나 국가들은 절대악이고, 반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 정부는 절대선일 수도 있다.

이 전쟁이 미국 석유자본이나 군수자본의 이해와 무관한 정의의 전쟁일 수도 있다. 부시가 사심 없는 정의의 집행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9ㆍ11 이후의 세계사를 과부하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미국의 애국주의는불길하다.

이 힘센 나라의 자존심이 궁극적으로 초래할 재난이 너무 끔찍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제어할 힘은, 다른 어느 나라 시민들에게 보다 훨씬 더 큰 비중으로 미국인들 개개인에게 있다.

아프가니스탄 바깥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고 있는 이 전쟁 뒤에 (비판자들이 믿고 싶어하듯) 특정한 정치세력이나 자본가 집단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미국 시민 개개인이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으면이 전쟁은 멈출 수 있다.

부시는 세계 어느 나라 정부나 반전세력보다도, 심지어 미국의 이런저런 자본가들보다도, 미국 유권자들의 눈치를 더 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냉철해지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시민들보다 미국인들의 의무다. 지구촌의 메트로폴리스로서의 미국은 인류의 모든 희망과 절망이 솟아나는 곳이고, 인류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고종석 편집위원 보스턴에서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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