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 ‘성폭력 의료지원센터’를 설치ㆍ운영한지 두 달이 지났다.10월 11일 경찰병원을 시작으로 현재 서울보훈병원, 인천 길병원, 강원 동인병원등 전국에 7개 병원이 ‘여성폭력긴급의료지원센터’로 지정됐다.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경찰병원을 찾은 피해여성들을 통해 운영실태를 살펴보았다.
경찰병원 ‘여성의료지원센터’가 문을 연 이래. 10월 13명, 11월 9명, 12월 현재 3명 등 모두 25명의 성폭력피해자가 다녀갔다.
피해직후 119나 112, 1366에 전화하면 경찰병원을 비롯한 긴급의료지원센터로 후송되지만 아직도 이곳을 곧바로 찾는 경우는 드물다.
센터가 생기면서 이곳에 배치된 윤연옥 서울시 여성복지상담원은 “대부분 두 세 군데 병원을 전전하다 새벽녁이 돼서야 찾아 온다. 심할 경우 다섯 곳에서 진료를 거부당하고 오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곳에 오면 우선 상담원을 통해 안정을 찾고 간단한 문진을 거친 다음 정액채취등 증거물 수집을 위한 검진을 한다.
대부분 병원에서 환자들을 거부하는 구실 중 하나는 “검사도구가 없다”는 것. 하지만 의료진은 “정액 검사는 현미경만 있으면 한 시간 내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검사 후에는 사후피임약과 성병 예방약을 투여하고 외상을 치료한다.
형사고소를 원할 경우 병원측은 담당 경찰관에게 증거물을 전달하거나, 경찰 증언이나 법정 출석 등을 해준다.
사실 일반 병원에서 성폭력 환자들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법적 절차 때문이다.
원형섭 응급의학과장은 “개인병원의 경우 법정에 출석하려면 하루는 병원문을 닫아야 한다. 의료인들의 양심에만 호소할 게 아니라 미국처럼 증거제출과 법정출석등을 전담하는 성폭력 전담간호사 제도 같은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은 정말 몰랐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피해 유형은 천차만별이다.
그 중 5~13세의 아동 성폭행이 10건이나 된다. 한 초등학교여자 아이는 같은 학교 6학년 남학생에게 거듭 성폭행을 당한 후 두 달이 지나서야 찾아오기도 했다.
길을 가다 낯선 남자에게 아파트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한 정신지체 장애인도 성폭행이 전형적인 ‘약자에 대한 폭력’임을 실감케 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의 경우, 명백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먼저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피해자들은 더 괴롭다.
한 여대생은 데이트 중 술에 취한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병원을 찾았다. 이른바 ‘데이트 강간’이다.
회식 후 상사와 단둘이 남은 자리에서 폭행을 당한 30대 직장인도 육체적 고통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더 가슴 아파했다.
원치 않는 부부관계의 지속으로 성기가 심하게 손상된 40대 여성도 있었다.
기혼환자들은 모두 남편이나 보호자 없이 혼자 병원을 찾는다. 윤 상담원은 “다른 질병이나 사고라면 절대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단면”이라고 말한다.
‘튼튼한 출입문을 만들어라’ ‘주차할 때 주변 차량들을 살펴라’ 같은 성폭력상담센터의 예방지침이 성폭력을 막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원 과장은 “여성들의‘몸조심’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원치않는 성관계는 곧 성폭력’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아야 한다” 고 말한다.
/양은경기자 key@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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