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발부된 이무영(李茂永ㆍ57) 전 경찰청장과 김승일(金承一ㆍ58) 전 국정원대공수사국장의 구속영장에는 이들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사건을 조작, 은폐했는지 경위가 상세히 드러나 있다.특히 국정원측 사건은폐 주도자가 김 전 국장이 아닌 엄익준(嚴翼俊) 당시 2차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또 다른 충격을 주고 있다.
▽안기부의 사건은폐
1987년 1월5일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여간첩의 납북 미수사건’이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은 안기부는 당시 해외담당 부국장 장모씨를 싱가포르에 급파했다.
8일 태국 방콕에서 윤태식(尹泰植)씨 기자회견을 주선한 장씨는 9일 함께 귀국, 다시 한번 기자회견을 가진 뒤 그를 안기부 남산분실로 데려왔다. 윤씨는 1월26일 아내 수지 김(본명 김옥분ㆍ金玉分ㆍ당시 34세)의 시신이 홍콩 자택 침대 밑에서 발견되자 결국 범행사실을 자백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당시 어수선하던 시국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던 안기부는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윤씨는 4월께 풀려났고 14년 동안 아무런의심 없이 생활했다.
▽찰의 재수사
이 사건이 다시 불거진 것은 지난해 1월 SBS 제작팀이 홍콩현지 취재에 나서면서부터.
주홍콩 총영사관외사협력관은 같은 달 28일 ‘보도예상보고 및 범죄첩보서’를 국내로 보내 “홍콩 경찰이 정황증거를 확보, 윤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고 보고했다.
29일 김병준(金炳俊) 당시 외사관리관은 29일 경찰청 외사분실에 사건을 배당했으며 수사팀은 2월7일 홍콩경찰로부터 종합수사보고서, 당시 참고인진술서 등 100여 페이지의 수사자료를 넘겨받았다. 경찰은 같은 달 11일과 12일 윤씨를 소환, “지난 87년 안기부에서 사실대로 진술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14일 국정원 대공수사국 수사3과에 사건기록 열람 신청서를 보냈다.
▽국정원 및 경찰의 재은폐
경찰의 열람신청서는 대공수사3과, 김모 당시 대공수사1단장, 김 전 국장을 거쳐 15일 엄 전 차장에게전달됐다. 당시 국정원도 이미 홍콩주재관으로부터 방송 취재상황을 보고 받았으며 내부적으로 ‘사건 재은폐’를 결정한 상태였다.
김 전 국장은 엄전 차장으로부터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 망신이다. 경찰청장에게 사건의 전모가 공개되면 곤란하다고 전하라”는 지시를 받은 뒤 같은 날 오전이 전 청장을 찾아갔다.
김 전 국장은 “엄 차장의 지시를 받고 왔다. ‘수지 김 사건’은 간첩조작 사건이며 진범은 윤씨인데 87년 안기부가 사실을 알고도 덮었으니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국정원의 방침은 무엇이냐”고 되물은 이 전 청장은 “사건을 수사하지 않고 계속 덮어두는 것”이라는 답변이 떨어지자 곧바로 김 전 외사관리관을 불러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이 다녀갔으니 사람이 오면 사건을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수사팀이 17일 국정원에 수사기록 일체를 넘겨줌으로써 18일간의 재수사는 마무리됐다. 수사팀의 마지막 서면기록은 16일 작성된 ‘김옥분사망관련 수사진행보고서(수사중지)’였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이무영前청장 영장반응
지난해 2월 ‘수지 김’사건에대한 경찰의 내사중단 지시를 내린 혐의로 이무영(李茂永) 전 경찰청장에 대해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자 경찰은 침통한 가운데서도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었다.
당초 경찰 내부에서는 국정원김승일 대공수사국장의 일방적인 진술이 흘러나올 때만 하더라도 상당한 반발기류가 흘렀던 것이 사실.
하지만 이 청장의 혐의가 상당부분 드러나자 조직적인대응이나 반발을 할 입장이 아니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경찰청 사이트 등에서도 이 청장 건과 관련, 별다른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아 이런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향후 국가 권력기관으로서경찰의 위상을 재정립하자는 자성론과 함께 향후 국정원, 검찰과의 관계에 있어 경찰의 처신이 앞으로는 달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경찰청 고위관계자는 “올 4월부평서 진압사건 당시 문책론에 대응해 반발움직임을 보였던 것과는 사안의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수지김 사건은 향후 국가 권력기관간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찰청의 총경급 간부는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지휘나 간섭 등에 대해 ‘법대로’ 분위기가 자리잡게될 것”이라며 “상급 기관이라 해서 구두요청으로 사건이 넘겨지거나 정보문건이 흘러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사건을 통해 국정원의 요청에 대한 업무처리에 내부의 비판이 잇따르면서 대공사건에 대해서도 문서를 통한 확실한 이관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정보에상당 부분 의존해온 국정원의 경찰 정보파이프도 수지 김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 마비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