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김 살해사건 은폐의혹과 관련, 전직 경찰총수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은 권력기관에 의한 사건 조작ㆍ은폐에 대한 검찰의 강경 대응 원칙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당초 검찰 안팎에서는 사건은폐를 주도한 김승일 전 대공수사국장은 구속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이무영(李茂永) 전 경찰청장에 대해서는 가담 정도와 예우 차원에서 불구속 기소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검찰이 사전영장을 청구한 데는 김 전 국장 등 사건 관련인의 진술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국장은 검찰조사에서 “지난해 2월15일 경찰청으로 이 전 청장을 찾아가 사건 내막에 대해 설명하고 협의했다”며 “당시 엄익준(嚴翼駿ㆍ사망) 국정원 2차장이 미리 이 전 청장에게 전화로 협조를 부탁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모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1단장도 “김 전 국장이 ‘이 청장과 이미 얘기가 됐으니 사건기록을 넘겨받으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더구나 김병준(金炳俊) 전 외사관리관과 이강수(李康壽) 전 외사3과장 등 경찰청 간부들까지 이 전 청장으로부터 사건 처리지시를 받았음을 인정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전 청장이 처음부터 자신의 개입사실을 모두 부인하는 바람에 오히려 공모 혐의가 부각됐다”며 “객관적 정황이나 진술상 이 전 청장이 사건내막을 알고 수사중단 청탁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재임 당시 ‘실세 경찰청장’이었으며 현재 전북도지사 출마를 희망하는 등 정ㆍ관계에 상당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이 전 청장에 대한 영장청구는 경찰의 반발과 함께 구구한 해석도 낳고 있다.
경찰쪽에서는 “경찰개혁 등을 주도한 이 전 청장을 견제하기 위해 검찰이 무리하게 법적용을 한 것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최근 ‘이용호ㆍ진승현 게이트’ 등으로 국민적 의혹을 받고 있는 검찰이 이번 사건을 위기극복의 계기로 삼으려는 한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검찰이 사전영장청구라는 형식을 이용한 것도 구속여부 판단을 법원에 넘김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이 전 청장이 김 전 국장과 함께 사건은폐를 공모한 사실이 드러난 만큼 형평성 차원에서 두 사람 모두 영장을 청구할 수 밖에 없다”며 “이 전 청장이 혐의를 부인하는 등 증거인멸의 우려도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10일 중 이 전 청장에 대한 영장이 발부될 경우 경찰조직 및 정가에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며 국정원과 경찰 간부에 대한 후속 사법처리와 함께 87년 당시 은폐 진상에 대한 고강도 조사도 이어질 전망이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이무영 前경찰청장 영욕史
9일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이무영 전 경찰청장은 재임시 여권내의 탄탄한 인맥을 기반으로 경찰개혁을 주도하며 ‘실세(實勢) 청장’으로 불린 경찰 호남인맥의 대표적 인물이다.
전주상고 출신으로 간부후보 19기인 이 전 청장은 현 정부 들어 경찰대학장과 서울청장 등 요직을 거쳐 1999년 경찰총수의 자리에 올랐다.
80년대 말 서울 강남서장 재직 당시 부하직원의 비리사건으로 직위해제되는 시련을 겪었으나 특유의 업무 추진력과 오뚜기 같은 저력으로 경찰대 학생지도부장으로 기사회생했다.
99년 서울청장 재직시절 ‘신시위 문화 정착’을 내세워 무최루탄 원칙을 정착시키고 경찰청장 취임 이후 2년여간 경찰관 처우개선과 직무관행 변화 등 경찰개혁을 주도, 하부 직원의 높은 지지와 함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청장 재임 당시 독선적 업무스타일과 특정인맥 위주의 발탁인사로 내부 반발을 샀으며 경찰제복 로비 등 각종 이권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
또 지난해 치안정감 4명이 한꺼번에 물러나는 인사파문과 경찰대 출신 간부들의 집단 지지성명 파문 등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여권의 두터운 신뢰를 기반으로 2년간 경찰총수 자리를 지켰다.
여권 실세와의 교분 등 폭 넓은 정계 입지를 바탕으로 청장 재직 당시부터 유력한 전북지사 후보로 점쳐졌다. 청장 퇴임 직후 도지사 출마를 선언하며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도했으나 ‘수지 김 사건’이라는 뜻밖의 암초에 걸렸다.
신병처리 여부는 이제 법원의 판단에 달렸지만 일단 검찰이 사법처리 방침을 정한 이상 정치생명에 위기를 맞은 것은 물론 30여년간의 공직생활에도 적지않은 오점을 남기게 됐다.
배성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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