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경북 경주시 감포읍)의 밤바다에 섰다.푹신한 모래밭이 아니라 파도 속에길게 드리워진 방조제다. 가파른 방조제에 쉽게 오르라고 누군가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연인들이 차례로 오른다. 남자가 먼저 올라 여자의 손목을 잡아 끈다. 바람이 분다. 모자를 날려 버릴 만한 거친 바람이다.
눈을 할퀴고 지나가자 눈물이 솟는다. 앞에 보이는 것은 등대의 검은 윤곽,그리고 멀리 수평선에 빛나는 집어등이다.
캄캄한 무대, 낡은 조명 하나가 덜 꺼진 채 무대를 지키는 것 같다. 방조제를 때리는 파도 소리만 귀를 어지럽힌다.
하늘이 어슴프레 밝아진다. 달이 뜬다. 달은 해처럼 요란스럽게 뜨지 않는다. 수줍은 밤고양이처럼 몰래 모습을 보인다.
운이 좋았다. 보름달이다. 무대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무대의 주인공은 달빛을 받은 밤바다이다. 가슴이 서늘하리만치 창백한 빛을 내뿜는다.
파도에 따라 그 창백한 표정이 바뀐다. 찬바람에 솟아오른 눈물이 앞을 가려 바다의 표정은 또 바뀐다. 그래, 이게 겨울바다야.
감포는 바다의 이색적인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눈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눈 뒤로는 아기자기한 포구의 정취가 있다.
천년고도 경주에는 왕릉과 불상과 절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함산을 넘어 동쪽(4번 국도)으로 방향을 잡으면 고도의 향냄새가 짙게 밴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
번잡한 포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남북으로 잠시 이동하면 된다.
봉길, 대봉, 나정, 감포, 오류 등 크고 작은 해수욕장이 지천이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밭이 펼쳐진다.
드문드문 짝을 지어 파도 앞에 앉은 연인들을 볼 수있다.
경주의 이름에 걸맞은 의미 깊은 유적도 많다. 감포에서 남쪽으로 약 20리. 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가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죽어 용왕이 돼 왜적을 막겠다”며 뼈를 뿌린 대왕암, 그가 직접 터를 닦은 감은사터,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대찰 기림사, 한국의 돈황석굴로 알려진 굴암 등 조상의 숨결을확인할 수 있는 유적지가 밀집해 있다.
감포에는 끝자리가 3이나 8일인 날 가면 더 좋다. 5일장이 선다. 경북 해안의온갖 수산물이 장바닥을 채운다.
구경만 해도 배가 부르다. 고무광주리를 벗어나려는 대게, 펄떡거리는 숭어, 감포 특산 피데기(덜 말린 오징어)와 과메기가 겨울장의 주인이다.
한 바퀴 돌아보고 횟집에 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홍합국 한 사발에 언 손과 볼을 녹인다.
/ 경주=권오현기자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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