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2월3일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서울 휘문의숙에서 결성됐다.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 연구회를 만든 이는 임경재 최두선 권덕규 장지영 등 한힌샘 주시경의 제자들이다.조선어연구회는 1931년1월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쳤고, 우리 정부 수립 뒤인 1949년 9월 지금의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했다.
한글학회가 일제때 겪은 가장 커다란 고난은 1942년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이다.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과 국어연구에서 ‘불온한’ 민족주의를 감지한 일제는 학회 회원과 관련자들 수십명을체포해 모질게 고문하고 그 가운데 13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옥중에서 이윤재 한징 두 회원이 고문과 기아로 죽었고, 주요 관련자들은해방 이틀 뒤에야 옥문을 나왔다.
학회의 일제시대 활동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은 1933년에 확정 발표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일 것이다. 이 통일안을 그 당시의 한국어 신문들이 채택함으로써 그 때까지 한글 표기가 겪었던극심한 혼란이 극복됐다.
지금 남과 북의 국어 철자법은 그 당시의 통일안을 조금씩 손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933년의 이 한글맞춤법 통일안은실용성에서만이 아니라 이론적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통일안의 핵심은 모든 형태소가 그것의 기본형으로 선정된 단일형태로 표기되는 형태음소론적표기라는 점에 있다.
이 원리에 따라 고립적으로는 똑 같이 /낟/이라고 읽히는 말들이 낟, 낫, 낯, 낱으로 다르게 표기된다.
한국어의 음운조직원리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 형태음소 표기는 그 당시 유럽 구조조의 언어학의 형태음소론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30년 뒤에야미국에서 출현할 생성음운론의 기저형 표기와 이론적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만하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