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 우왕좌왕하던 재벌 관련 정책이 드디어 중대한 기로에 섰다.정부는 최근 들어 여ㆍ야와 정책협의를 거치면서 연내에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제출할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1987년 이후 재벌 규제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던 30대 그룹 지정제도와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하게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두 가지 정책은 지난 10여년 간 재벌규제 정책의 대표격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규제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들로부터는 폐지 혹은 개정 주장이 거셌다.
현재 여ㆍ야ㆍ정 사이에는 기업집단 지정의 기준이 되는 자산규모를 얼마로 할 것이냐, 출자총액제한의 기준을 순자산의 몇 %로 할 것이냐 등의 미세한 입장차이만 있을 뿐, 규제 완화의 분위기는 무르익은 상태이고, 반면 시민단체 등은 "규제 완화란 있을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상반된 주장들은 모두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규제 완화론자의 근거는 "기업의 규모가 커지는 것에 대해 불이익을 주고, 특정한 종류의 투자를 강요하거나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자본주의 기업활동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규제 존속론자의 근거는 "이 제도가 없어질 경우 재벌이 계열사간의 출자관계 등을 이용하여 규모팽창을 추구하게 되고, 오너의 지배권을 남용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견대립은 쟁점 자체가 정책 문제점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제3의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순위 기준'이건 '자산총액 기준'이건, 단순히 특정 규모를 기준으로 규제 대상을 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잘못된 일이라면 덩치가 크건, 작건 규제되어야 하고, 잘못이 아니라면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허용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규제대상이 아니었던 30위 이하의 그룹들이나 공기업들까지도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규제 완화가 아니라 규제 강화라고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순자산의 몇 %를 기준으로 할 것이냐'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면 조금도 허용되어서는 안되고, 잘못이 아니라면 전면적으로 허용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해답은 기업집단 지정제도 및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기업간 '출자관계의 구조'에 대한 규제로 정책을 전환하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 재벌의 계열사간 출자관계는 엄격한 수직적 위계구조로 짜여 있어서, 어느 계열사로부터 시작하든 그 계열사의 지배주주, 그 지배주주의 지배주주, 이런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궁극적으로는 그룹회장이라고 하는 개인에게 모든 지배권이 집중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그 힘의 크고 작음은 그룹회장이 투자한 최초의 출자규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떤 식에 그것을 대입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 식을 풀어내어 문제의 근원을 차단하는 것이 보다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치유책이 되는 것이다.
OECD의 기업지배구조 가이드라인에서 재벌과 같은 출자구조를 주식 피라미드라 하여, 특정 주주의 지배권 독점을 통해 기업지배구조의 건전성을 해치기 때문에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기업이 다른 기업에 얼마를 출자하든 그 자체를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익추구를 위한 출자가 아니라 지배권 독점을 위한 출자는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이고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부합하는 길이다.
규제의 무조건적 철폐가 아니라, 비합리적 규제에서 합리적 규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장덕진 이화여대 교수 경제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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