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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이 책]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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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이 책]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입력
2001.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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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발행)은 내 게으른 독서가 만난 ‘미지의 책’이다.극단적으로 파편화되어 있고, 지나치게 에세이적인 이 책이 소설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그 안에는 전모를 이해할 수없는 명상적인 언어들이 뿌려져 있다.

무작위로 책의 몸을 열어 그 속에서 예리한 문장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산만한 독서의 행복에 속한다.

이 책에서의 사랑의 담론은 극적인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존재론과 사랑의 언어에 관한 집요한 탐구의 열정을 품고 있다.

저자는 ‘성교’에서 ‘결별’에 이르는 사랑의 사건들을 서사화하지 않고, 그 단어들 속에 축적된 언어학적ㆍ철학적ㆍ심리학적 의미의 겹들을 정밀하게 분석한다.

여기서의 전언 중의 하나는 ‘사랑의 반사회성’과 ‘동물적인 순수성’에 관한 것이다. 사랑이란, ‘은밀한 생’이다.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 문이다.”

사회적 동의를 비껴가는 사랑의 가파른 존재론에 대한 성찰은 구체적인 통증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우리는 “세상에서부터 단절되어서, 시간 자체에 의해 소멸되고 마지막 남은 미개한 원주민처럼 살아가야만 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두사람의 사랑보다 더 이 세상을 경멸하는 것도 없다”와 같은 진술을 읽을 때, 혹은 ‘성교’의 언어학적 기원을 추적하여 그것을 ‘함께 걸어가다’‘타인과 함께 하는 여행’ ‘시선 밖으로 벗어나는 인간의 유일한 이동’이라고 정의할 때, 이런 분석적 명상은 매혹을 넘어 공포를 전파시킨다.

사랑이 사회적인 언어 이전에 있다는 것을 논증하기위해, 이토록 많은‘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은전율적인 아이러니를 동반한다.

“사랑할때 연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그림자를 향해 몸을 돌리지만 서로 껴안으면서 그림자를 뭉개버린다”와 같은 날카롭고 아름다운 문장을 당신과 나눈다.

나는 사랑한다, 즉 ‘너라는 책’을 펼쳐놓고 읽는다.

/이광호 문학평론가ㆍ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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