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때는 발레 무용수가 귀족 청년을 사랑했다.여자는 신문에서 남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읽고 생계위협에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다.
런던의 워터루 다리에서 극적으로 남자를 다시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여자는 자괴감에 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안개 속의 재회와 비비안 리의 비극적 인생이 여성관객의 손수건을 흥건히 적셨던 1940년 흑백영화 ‘애수’(감독 머빈 르로이).
2차 대전 때는 가난한 봉제공 릴리(안나 프릴)가 연합군으로 참전한 캐나다 청년찰리(에이든 영)를 사랑한다.
무대 역시 전쟁 포화가 그칠 날이 없는 런던. 클럽에서 춤 파트너로 만난 둘은 우아한 발레리나도 돈 많은 귀족도 아니다.
캐나다 산골의 찢어지게 가난한 농군인 청년은 존 웨인과 이웃에 살며 거대한 목장을 갖고 있다고 허풍을 떤다.
전쟁은 죽음이 두려운 청년과 폭격으로 고아가 된 여자를 더욱 뜨겁게 만든다.
식탁보로 웨딩드레스를 해 입고 결혼을 치른 여자는 6일 만에 남자가 전장으로 떠난 후 딸을 낳는다. 그리고 딸과 희망을 안고 남편의 고향인 캐나다로 온다.
아! 이럴 수가. 산 넘고 넘어 도착한 시댁은 그야말로 두메산골, 허허 벌판의 외딴집. 함께 온 친구 소피의 몬트리올의 시댁과 이렇게 다를까.
게다가 무뚝뚝한 시어머니(브렌다 프릭커)와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소아마비로 한쪽다리가 불편한 시누이 실비아(몰리 파커).
시선이 곱지 않다. 좋아,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한번 바꿔 보자.
‘잉글리쉬 브라이드’(영국 신부)인 릴리는 아름답고 애처로워 남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애수’의 비비안 리가 아니다.
자기 운명에 괴로워하다 삶을 포기하는 비극적 여성도 아니다. 건강하고, 씩씩하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긍정적인 여자이다.
이 말괄량이 전쟁 신부(The WarBrideㆍ영화의 원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여주인공 베스(에밀리 왓슨)를 닮아있다.
현실을 피하기보다는 현실에 당당히 맞서는 릴리의 건강한 태도야말로 유쾌하고 아름다운 페미니즘이다.
그것이 문화의 이질감을 극복하게 해 주고,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
시어머니는 죽은 남편에 대한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열등감을 씻은 시누이는 사랑을 얻는다. 집으로 돌아와서 전쟁의 악과 공포로 신음하는 남편까지 치유한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비극적 매력의 비비안 리가 ‘마음의 연인’이라면, 예쁘지는 않지만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영국배우 안나 프릴은 ‘삶의 연인’이다.
미국, 캐나다, 영국 배우의 앙상블과 그것을 경쾌하게 풀어낸 ‘네이키드 소울’의 린돈 처벅 감독의 재치도 안나 프릴의 연기만큼이나 빛난다. 12월 8일 개봉.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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