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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김 동생 옥임씨가 토로한 '눈물의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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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김 동생 옥임씨가 토로한 '눈물의 15년'

입력
2001.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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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김(본명 김옥분ㆍ金玉分ㆍ당시 34세)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윤태식(尹泰植ㆍ43)씨의 첫 공판을 하루 앞둔 26일, 1남6녀중 여섯째인 동생 옥임(玉臨ㆍ39)씨의 충북 충주시 자택을 찾았다.수지 김이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되면서 가족들이 겪었던 15년간의 고통과 한, 만신창이가 된 집과 가족…. 옥임씨는 그 피맺힌 사연을 눈물로 토해내며 몸서리쳤다.

“소설 3권을 쓰고도 남을 만한 사연”이라는 그의 말처럼 전율까지 느껴지는 수지김과 가족 얘기를 들으며 기자도 가슴으로 함께 흐느꼈다.

▼16살때 무작정 상경

“신원불명이거나 가족들이 수습하지 않은 시신을 화장해 묻어둔 한 묘지에 언니의유골도 함께 묻혀 있었어요.

잡초 무성한 그곳에 유독 언니의 조그만 무덤에만 풀 한 포기 없더군요. 언니의 한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습니다.”

지난 21일 언니가 비운에 간 홍콩땅을 처음 밟아 언니의 시신이 묻힌 공동묘지를 찾았던 그는 무덤가에서 가져온 한줌 마른흙을 보여주며 이렇게 회상했다.

수지 김이 궁핍한 살림에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상경한 것은 16살 되던 1967년 여름. 당시 아버지는 무직이었고, 오빠가 연탄공장을 다니며 겨우 생활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로부터 1년 뒤 언니는 당시로는 고급인 빨간색 내의 등 선물을 잔뜩 사 들고 고향으로 왔지요. 언니는 버스차장(안내원)을 한다고 했는데 ‘중학교 졸업장 따서 더 좋은 회사에 다닐 거야’라고자랑하더군요.

그 뒤로 돈을 많이 벌었는 지 70년대 들어서는 논도 사주고 집도 마련해 주었어요.” 수지 김은 땅 한 마지기 없던 집안을 일으키고동생들 학비까지 도맡아 챙긴 기둥이자 희망이었던 셈이다.

”당시 언니가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식구들은 몰랐어요. 그후 서울에서 함께 생활한 작은 언니(옥경ㆍ4째)에게만 호스티스 일을 한다는 걸 말해 준 모양이예요. 언니는 가족을 위해 험한 일을 했고 가족을 위해 번 돈을 모두 쓴 겁니다.”

▼돈 더 벌려 홍콩행

79년 말 수지 김은 돈을 더 벌기 위해 연예인 공연단의 일원으로 홍콩으로 건너갔다. 이후 비자연장을 위해 위장결혼을 한 뒤 83년 홍콩인과 정식 결혼, 아이까지 낳았지만 86년 이혼하고 만다.

“언니는 ‘친한 친구가 남편을 빼앗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홍콩에서 함께 있던 내가(옥경ㆍ5녀) 비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나왔는 데, 그때 외로움에 지쳐있던 언니에게 윤씨가 나타났어요.

86년 10월쯤 언니는 결혼할 남자라며 윤씨를 데리고 충주집으로 왔어요.

육사를 나왔다며 반지까지 보여주곤 했는데 내 남편이 ‘그건 3사관학교 반진데요’했더니 안절부절 못할만큼 거짓말도 해 가족들이 신뢰하지 않았지요.”(옥경씨 증언)

수지 김은 결국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씨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줄곧 순탄치 않았다.

“윤씨 본부인이 몇 차례 전화를 걸어와 언니가 고민을 많이 했고 부부싸움을 하면 윤씨는 언니를 초죽음으로 만들만큼 두들겨 팼다고 하더군요.

죽기 얼마 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족에게 몇백만원이나 몇십만원씩 돈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다 해를 넘긴 직후에 갑자기 북한공작원으로 몰렸고 시신이 발견됐어요.”(옥경씨 증언)

▼가족도 풍비박산

수지 김의 죽음 이후 가족들도 풍비박산이 됐다.

“윤씨가 언니를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하면서 당시 안기부가 우리 집에 찾아와 부린 행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화장실까지 감시하고 심지어 형부(옥경씨 남편)까지 안기부로 불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사건 이후 충격을 받고 실어증에 걸렸고 결국 97년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

심약했던 큰 언니 옥녀씨는 담배공장에서 쫓겨난 뒤 실성했다. 수지 김 사건이 대서특필된 신문을 들고 “옥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됐다.

나 담배공장에 취직시켜 준댄다. 옥분이가 간첩이래”라며 횡설수설하다 ‘옥분이가 오란다’며 나간 뒤 버스 안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오빠는 교통사고로 숨져

동생의 한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오빠 만식씨(둘째)와 나머지 여동생의 삶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오빠는 사건 이후 수년간 매일 술로 지새웠어요.

지난해 몇몇 언론이 관심을 갖길래 ‘왜 또 괴롭히느냐’며 협조하지 않다‘동생의 억울함을 밝혀야겠다’는 결심이 섰는지 공소시효가 얼마남지 않았던 지난해 3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팀의 협조로 서울지검에 고소장까지 내셨어요.

그러나 오빠는 지난해 7월 술을 마시고 길에 앉아있다 후진하는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지요. 중학교 2학년이던 조카도 학교에서손가락질을 못 견디고 자퇴하고 학업을 중단했어요.”

수지 김이 간첩으로 몰린 뒤 여동생들은 시댁 식구로부터 온갖 냉대와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결국 옥임씨는 93년 결혼 6년 만에 이혼할 수 밖에 없었다.

▼명예회복 바랄 뿐

수지김의 가족은 윤씨의 납북미수 기자회견 뒤 10여일 만에 홍콩 아파트에서 시신이 발견되자 동생의 누명이 풀릴 것으로 착각할 만큼 순박한 사람이었다.

“시신 발견후 안기부 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미안하다’고 해서 오빠가 술잔을 던지기까지 했어요. 우리는 당연히 간첩누명이 벗겨지고 윤씨는 징역을 살고 있는 줄 알았지요. 국가기관이 나서서 누명을 벗겨줄 것으로 믿었어요.

배우지 못한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그 사람들은 사죄 한마디 없어요. 한 개인과 가족의 일생을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해놓고도 버젓이살 수 있다면 인간입니까.”

옥임씨는 최근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수지 김 사건에 대한 경찰수사마저 막았다는 사실을전해 듣곤 한번 더 치를 떨었다. “우리 가족은 그 동안 안기부의 노리개나 마찬가지였어요.

우리 가족의 권리를 지켜줄 곳은 언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15년 동안 없어지고 묻힐 사건이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인이 있었기 때문에 밝혀진 겁니다.”

손해배상 청구 등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옥임씨의 답변은 간단했다. “가난하고 아는 게 없어 15년 동안 당해왔습니다.

손해배상이 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관심은 언니에 대한 명예회복이고 윤태식에 대한 처벌입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 '제2 수지 김'은 없나…

국정원은 과거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시절 ‘수지 김 사건’ 뿐만 아니라 각종 공작정치에 간여, 의문사와 의혹사건의 배후나 몸통으로 지목되는 등 불명예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다.

1973년 10월19일 새벽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최종길(崔鍾吉ㆍ당시 41세) 서울대 법대 교수가 변시체로 발견됐다. 중정에 불려간 지 49시간 만이었다. 당시 중정은 “간첩혐의를 시인한 최 교수가 자책감을 못이겨 투신했다”고 발표했다.

꼭 28년 뒤인 지난달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투신자살로 보기 어렵고 중정이 밝힌 현장검증 시간도 조작됐다”고 밝혔다. 당시 중정 관계자도 “최 교수를 상대로 수년간 공작을 벌여왔다”고 증언, 최 교수가 중정의 희생물이었음을 시인했다.

같은 해 8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아찔한 일을 겪었다.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역시 중정의 ‘작품’이었다.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명시적ㆍ암묵적 동의를 얻어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단행한 것”이라고 본국 국무장관에 보고한 사실이 98년 공개돼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67년 교수 예술인 등 66명이 연루돼 고초를 치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은 전형적인 공작정치의 산물. 부정선거 시비로 여당이 구석에 몰리자 중정은 돌연 독일 유학생 등 대규모 간첩단을 꾸며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다.

5개월 뒤 구속자 대부분 무죄 석방됐으나 훗날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尹伊桑)씨 등은 반체제인사로 낙인 찍혀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74년 4월 중정의 주도로 학생, 진보 지식인 등 180명이 기소된 민청학련 사건 또한 관련자 대부분이 사형 등 중형이 선고됐음에도 불구, 이듬해 142명이 무더기로 출소하는 등 사건의 허구성이 드러났다.

한편 89년 전남 여천군 삼산면 덕촌리 거문도 앞바다에서 변시체로 발견된 당시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당시 27세)씨가 실종되기 직전 동행한 사람이 안기부 직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각종 의혹사건 배후에 국가정보기관이 거명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강 훈기자

hoon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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