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속 정원이 있는 음식점가을은 이미 가버렸다. 살얼음이 일기 시작하는 서울 거리에서 가을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늦가을의 풍광이 남아 있는 곳은 있다. 더군다나 고급스런 한 끼 식사까지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낙엽이 떨어지는 정원을 바라보면서 정통 한정식의 맛에 빠져드는 호사스러움을 느껴보자.
색다른 느낌을 주는 도심 속 '정원이 있는 음식점'을 찾아가면 된다. 맛과 여유가 함께 하는 시간으로 마음 속이 풍성해진다.
■종로 삼청각
노란 은행잎이 서너 겹 쌓인 삼청동 길을 따라 삼청각으로 찾아간다.
짧은 터널을 지나 맞닥뜨린 곳에 조용한 암자가 숨어 있었다. 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인심 맑은(人淸) 곳의 암자, 삼청각.
세가지 푸름이 만나는 만큼 이곳에 들어오면 서울 속에 와있는지 강원도 깊은 산골에 들어와있는지 모를 정도가 된다.
하지만 숲 속에 몸을 감춘 고요한 겉모습과는 달리 이곳은 복잡하고도 깊은 사연을 담고 있다. 1972년 준공된 삼청각은 한국 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7ㆍ4 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 적십자 대표의 만찬장으로 시작해 외국의 국빈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여왔다.
그러나 1970년대 요정문화의 발달과 함께 현대판 기생이 나오는 방석집으로 전락한 아픈 역사가 있다.
1980년대 후반 요정문화가 쇠퇴하면서 1996년 예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근 서울시에서 전통문화체험공간으로 변모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삼청각은 이제는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 만이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호텔 한식당의 한 끼 식사를 즐기거나 차 한잔 마실 여유를 갖고 싶다면 사시사철 어느 때나 이곳에 한 번 들를 만 하다.
특히 깊은 가을에는 쓸쓸한 서울 전경과 어우러져 맛과 멋을 더한다.
지난 10월 29일 서울프라자호텔과 서울시가 복합문화공간으로 문을 연 뒤 삼청각은 변모했다.
새롭게 단장한 삼청각은 공연장과 한식당, 찻집, 객실 등 다양한 공간이 갖춰져 있다. 모두 6채의 한옥이 숲 속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프라자호텔 한식당 ‘아사달’이 그대로 옮겨와 요리를 책임지는 만큼 음식 맛은 수준급이다. 김치 맛 전골 등의 기본요리부터 시작해 갈비찜과 해물매운탕에 신선로 등 갖가지 한정식 요리가 함께 나온다.
깔끔한 맛 그대로다. 가격은 일품요리 2만 5,000원 대에서 정식요리 8만원 대까지 다양하다.
5,000원에서 9,000원 사이인 전통차를 즐길 수 있는 찻집 ‘청다원’도 인기다. 삼청각 본관인 일화당 2층에 자리하고 있다.(02)3676-5678
■수서동 필경재
서울 강남구 수서동 필경재는 조선조 성종 때 건립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 사대부 가옥이다.
1987년 문화공보부가 전통건조물1호로 지정했을 정도로 기품이 가득한 건물이다.
일원터널을 지나 필경재로 들어서는 길부터 서울 답지 않은 늦가을 풍광이 가득하다. 건물 전체에 넓은 마당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자연과 친화하는 느낌. 묵향이 스며있는 듯 따스한 기운을 내쉰다. 잘 가꾼 정원수와 나즈막한 뒷편 언덕도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필경재(必敬齋).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옥호 만큼이나 이곳의 분위기는 겸손하다. 현재는 50칸 규모의 한옥이 남아 있다.
고택 뒷편에는 세종대왕의 다섯 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묘역이 있다. 12만 평. 조선 태조의 일곱 번 째 아들인 방번의 묘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엄청난 넓이에 감탄하며 그곳을 정성스레 가꿔온 후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 정안부정공의 종가집에서 한정식집으로 새로 태어난 것은 1999년 7월.
‘한국의 얼굴’을 만들겠다는 광평대군 19대손 이병무(57) 사장의 의지와 주변의 추천이 맞물렸다.
그러나 이 사장은 “조상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음식점 냄새가 풍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런 까닭인지 조리시설은 안채 뒷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고, 길가에도 음식점임을 알리는 큰 간판이 없다.
이곳을 주로 찾는 손님은 외국인이다. 한국 상사에서 외국 바이어를 대접할 때나, 외국계 다국적회사의 지사에서 본사 손님을 대접할 때에도 모두 이곳을 찾는다.
지난해 아셈 행사 때도 외국 주요 귀빈들이 이곳을 찾았다.
음식 맛도 이들을 겨냥해 그다지 맵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빨간 빛은 유지하면서 맛은 맵지 않게 만드는 비결이 호텔 한식당 조리사경력 30년의 주방장의 손끝에서 유지된다.
구절판, 신선로는 깔끔한 모양과 맛이 자랑이다. 신선한 육회와 떡갈비구이 등 육류, 짭짤한 간장게장과 생선구이, 장어구이, 전복죽등 해산물도 다양하다.
3만 5,000원에서 15만 원 사이의 코스요리가 있다. 특히 후식으로 나오는 두텁떡은 손님에게 내오기 직전 빚기 때문에 따뜻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반드시 전화예약을 하고 찾아야 한다. (02)445-2115
■방화동 장춘
강서구 방화동 국제청소년센터 옆에는 한정식집 장춘이 있다.
풍산 심씨의 99칸 고택을 그대로 살리면서 고급스런 한정식 집을 만들어냈다. 서울 구석자락에 있는 만큼 풍광이 늦가을 고즈넉한 빛을 그대로 담았다.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가 마음을 스잔하게 하지만 이곳에 들어서면 가슴 속이 다시 따스해진다.
풍산 심씨 사당과 한옥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질 만 하다. 상견례 장소로도 인기다.
음식 맛도 깔끔하다. 사장 전인수씨가 전국의 뛰어난 한정식 집을 돌아다니면서 손맛을 배우는 열의를 가졌다.
2만 5,000원에서 8만 원 사이의 한정식 코스 메뉴의 경우, 일반적인 한정식 요리에 직접 개발한 갖가지 요리들이 섞여 있다.
조미료를 쓰지 않는 만큼 맛이 심심하기도 하지만 뒷맛이 깔끔해 개운함을 더해준다.
밑반찬 하나 하나가 전라도 장 맛과 서울의 깔끔한 맛의 조화를 이뤄 입맛을 돋군다. (02)664-5446
■인사동 경인화랑
인사동 경인화랑은 구한말 개화파 박영효의 고택이었다. 넓은 마당을 둘러싼 한옥은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쓰인다.
그리고 마당 곳곳에는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좌석이 가득하다.
밤이 되면 나무와 벤치 사이에 켜진 조명이 분위기를 그윽하게 만든다. 여름이면 멍석자리에 앉아 가볍게 술 한 잔 마시는 여유를 즐기는 낭만이 있다.
물론 차 값이 없을 때 이곳을 찾아도 된다. 고요한 툇마루에 앉아 한 숨 돌린 뒤 전시물을 살펴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늦가을 이곳을 찾기에는 조금 추울 듯 하다. 그렇다면 봄을 기다리자. 수백 년의 역사 속에 살아남았던 만큼 내년 봄에도 이곳은 우리를 기다리고있을 것이다.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택 필경재. 멋과 맛이 함께 하며 ‘한국의 얼굴’로서 손색없는 공간으로 발전해가고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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