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태반이 '수사(修辭) 놀음'이다.국민이니, 역사니 하는 명분으로 분식한 들 대개는 당장의 수지(收支)를 따지는 시정의 장사행위와크게 다를 바 없다. 정치적 수지타산의 대상은 말할 것도 '표'다.
한창 논란 중인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에도 이런 계산법의 적용은 가능하다. 물론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교원정년 단축은 현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교육개혁 중에서 드물게 긍정 반응이 더 많았던 조치였다.
그래서 정년 재연장 시도에 대해 많은 학부모가 줄곧 반대해왔을 뿐더러, 같은 교원조직인 전교조만 해도 내놓고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화급한 교육현안들 대신 왜 하필 이 문제를?
한국교총의 회원은 공식적으로 19만2,500여명. 참고로 상대적 개혁성으로 인해 아무래도 입장이 현 정권 쪽에 좀더 가까운 전교조는 8만7,800여명이다.
정치권에서의 표 계산은 여기에 가족 한, 두 명이 더 얹혀진다. 한나라당이 교총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웠을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훨씬 더 많은 국민이 싫어하니 손해 아니냐"고?
그러나 직접 이해 당사자의 표와 불특정 다수의 표는 질적으로 다르다. 더구나 정년연장으로 당장 혜택을 입게 될 2,000여명은 교장, 교감을 포함한 '원로교원'들이다.
여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수 있는 지역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와 한나라당이 입장을 바꾸기도 난감한 노릇이다. 이미 욕은 욕대로 다 먹은 판에, 실속마저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더구나 지금 야당은 그깟 여론에 휘둘리지 않아도 될 만큼 강력하다. 1년도 더 남은 대선까지 어떤 변수가 있을 지는 모르지만, 추세로 보아 차기는 거의 한나라당의 장중(掌中)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게다가 민주당은 내분으로 저토록 지리멸렬한 판이니.
여기다 만약 현 국정원장이나 검찰총장(둘의 공과는 논외로 하더라도)을 낙마시킨다면 그야말로 한나라당의 대선가도에는 거칠 것이 없어진다.
정권 후기에도 늘 야당을 괴롭힌 것은 매양 정치적으로 이용되곤 하던 사정설(司正說) 아니었던가. 여기서마저 자유로워지고 나면 한나라당이 경계해야 할 것은 혹시 있을 자충수(自充數)뿐이다.
자, 그런데 국민들로서는 이런 현실정치의 계산법을 한가하게만 관망할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말끝마다 신주단지처럼 떠받들여지는 국민 자신들이 실제로는 정치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돼 있는 지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정치인들의 이런 수지 계산법 밑에는 우리의 일반적 정치수준에 대한 냉소가 깔려있음을 부인키 어렵다.
지금은 다들 열화같이 반대해도, 1년쯤 후에는 직접 이해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전제돼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인들은 우리 국민들의 빈약한 메모리 용량과, 당장의 현안에 달구어졌다는 곧 식어버리고 마는 냄비근성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 여야간 큰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선거 때마다 강조되는 정책대결이란 것도 그렇다. 지역구도 등에 따라 선택의 큰줄기가 이뤄지는 판에 까짓 정책이 뭐 그리 대수인가.
실제로 우리 선거사에서 정책이 큰 선택의 변수로 작용한 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화살 끝을 돌릴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정작 우리 자신이다.
정치인들이 일반 국민들을 지나치게 낮추어 본다고 화낼 일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그런 인식도 숱한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도출돼 나온 귀납적 결론일뿐이다.
장사도 고객의 성향에 따라 마케팅 방법이 달라지는 법 아닌가. 정치가 정확히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명제는 그래서 옳다.
/기획취재부장 이준희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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