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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 '아시아의 투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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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 '아시아의 투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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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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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을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부른 인도 시인이 있다고 한다.일제 식민지 한국을 '동방의 등불'로 찬양한 것처럼 연민어린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이래 아프가니스탄이 동서양 여러 문명이 만나고 충돌하고 어울린 실크 로드의 중심이었던 사실에 비춰 공허한 수사만은 아니다.

이번 전쟁으로 알려진 북부 도시마자르 이 샤리프는 페르시아와 투르크, 불교 문명이 어울려 번성한 인류 최고(最古) 도시의 하나다.

이란과 접경한 헤라트는 3,000년 역사와 아프간 문명의 정수(精髓)를 간직하고 있다.

국토를 가르는 힌두 쿠시 산맥 남쪽의 카불은 유명한 카이버 패스를 거쳐 인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했다.

신라 승려 혜초(慧超)가 8세기 카불 북쪽 바미얀을 순례한 사실은 아프간의 문명사적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문명의 교차점에 위치한 아프간은 수천 년 전부터 문명 정복자들의 발길이 빈번했던 전략 요충이다.

기원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을 시초로 페르시아와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이 일대를 차례로 장악했다.

몽골 후예 티무르 제국은 16세기 아프간 토착 세력과 연합해 광대한 인도 아프간 제국을 형성했다. 대영제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한 무굴 제국도 그 분파다.

오늘 날 아프간은 18세기 중반 파슈툰 부족 연합세력이 칸다하르에 세운 아프간 왕국이 뿌리다.

그러나 부족과 파벌 갈등으로 이내 쇠퇴했고, 19세기 남진을 노리는 러시아와 인도를 지키려는 영국의 제국주의 영역 다툼에 휘말려 주체적 존립 능력을 잃었다.

아프간을 경계로 한 두 나라 대결은 '대 게임'(Great Game)으로 불렸다.

한 세기 가까운 게임 과정에 영국의 3차례 침공을 물리친 아프간 신화가 탄생했지만, 그 배경은 러시아의 지원이다.

그러나 두 강대국은 위험한 무력 대결 보다는 아프간 부족과 파벌을 상대로 은밀한 지원과 매수와 암살 등 공작에 주력했다.

이를 통해 아프간왕조를 무력한 꼭두각시로 만들어, 상호 진출을 저지하는 완충 방벽으로 삼았다.

소련의 아프간침공과 무자헤딘 항전, 20년 내전도 시대 배경과 동원된 명분이 다를 뿐 지정학적 위치와 외세 개입이 결정한 비극적 운명의 반복이다.

오랜 외세 침탈과 고난을 겪으면서 아프간은 국가와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했다.

대소 항전의 영웅 무자헤딘도 전통적 생존 방식인 외세 결탁과 모반, 살육과 약탈로 파벌의 안녕과 이익을 쫓는 타락한 무리로 전락했다.

옛 왕조의 고도 칸다하르에서 태동한 탈레반은 이 운명적 질곡 타파를 표방하고 실천했다.

내전과 군벌의 탐학에 고통 받는 민중을 구제하고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웠고, 혁명적 수단을 동원했다.

쇠잔한 나라를 다시 세우려 했던 청나라 말기 의화단 운동이나 한말 동학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회교권 특유의 여성 차별의 가혹함만으로 탈레반운동의 정당성을 온통 폄하 할 일은 아니다.

그 탈레반을 외세가 간단하게 제압한 것은 당연하다. 고립되고 피폐한 약소국 혁명 집단의 항전은 B- 52 폭격기 앞에 닭싸움 자세를 취하는것과 마찬가지란 비유마저 있다.

소련의 악몽과 베트남전의 수렁을 지레 떠든 것은 탈레반의 악마성과 위험을 과장한 선전이었다. 오히려 탈레반은 무력한 패주를 통해 결코 광신 집단이 아님을 입증했다는 냉소적 평가가 나온다.

뉴욕 테러 훨씬 전부터 열강과 아프간 주변국은 중앙 아시아 석유 자원과 전략적 이익을 놓고 새로운 '대 게임'을 벌인 것으로 지적됐다.

이 전략적 게임을 원만하게 타협하려면, 탈레반 세력을 온건한 거국 정부로 대치해야 한다는 시나리오도 제시됐다.

아프간 전쟁은 이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괴뢰 북부 동맹이 카불을 장악하고 열강이 꼭두각시 정부 구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외세가 이권 분점을 노린 파병을 다투는 양상은 한 세기 전 제국주의 시대를 빼 닮았다.

그 20세기 초, 인도주재 영국 총독은 아프간을 '아시아의 투계장'이라 불렀다.

피 흘리는 싸움은 아프간인끼리 하고, 판돈은 게임 주역인 외세가 챙긴다는 얘기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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