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성기, ‘XX’는 과거도 현재도 엄격한 금기어다. 미래에도 그럴지 모른다.그래서 번역하자면 ‘XX의 독백’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 (이브 앤슬러 원작, 이지나ㆍ와이킷 탕 공동연출)는 영원한 화제작의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16일 대학로 컬트홀은 ‘금기’가 주는 은밀한 열기로 보조석까지 후끈했다.
배우 서주희는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 사전적 정의부터 시작해 이 단어를 무수히 발음했다.
그리고는 처음 클리토리스를 찾아본 ‘황홀한’ 체험까지 열 네 개의 독백을 쏟아냈다.
연극이 끝난 후 대학로 한 카페로 자리를 옮겨 공연을 본 여성 10명과 서주희가 두 시간동안 솔직하게 ‘금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주희에게)정말이지 입 밖으로도 못 꺼냈던 얘기를 대신 풀어주셨어요. 용기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몇 시간 전에 어떤 아저씨가 항의하러 극장에 들어왔어요. 포스터에 써있는 ‘XX, 질, 자궁’ 이런 용어들이 청소년 유해요소라는 거예요.
저도 무대에 서기 전에는 그 단어를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낸 적이 없었어요. 지금은 그냥 무채색의 고유명사일 뿐이지요.
-저는 임신 중인데 이 작품이 태교에 도움이 됐나 봐요. 엄마가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들을 진솔하게 들어서 감동을 받았는지, 애기가 막 움직이는 거 있죠.
(서주희가 놀란다. “어머, 그 말 들으니 나까지 눈물이나려고 하네.”)
-출산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접근이에요. 그곳에서 피가 나고 물러 터지면서 새생명의 출구가 열린다는 것은…. ‘이렇게 낳자’는 운동도, 무조건 낳지 말자는 반발도 아닌.
-제 나이가 올해 서른 하나인데 친구들끼리 겨우 하는 얘기가 ‘아기 낳고 나니 성이 환상이었다’는 정도예요. 그나마 결혼 안 한 사람들하고는 이런 얘기도 못해요.
-대학에서 조각을 배우는데 인체 모형을 지휘봉으로 가리키면서 ‘배는 두텁게, 어깨는 얇게…’ 이러다 말이 막히죠. 목소리가 수그러들면서‘요기는…’ 식이니까.
-기분이 좋아요. 사실 영화판에서는 배우에게 ‘이 XX’ ‘저 XX’하는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너무너무 싫어하는 말이었는데 그 본원적 의미를 듣고 나니까 좀 달라지네요.
-그런데 남자 관객들의 반응이 특이했죠?
다른 부분에서는 조용했는데 신음소리(극중에는 수십 가지의 신음소리를 구사하는 장면이 있다)에서는 다들 넘어갈 정도로 웃더라고요.
-그게 자기가 관계되는 부분이어서 그럴 거예요. 다른 얘기들은 체험해 볼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예민한 남자들은 출산 얘기할 때 눈물이 났대요. 군대위안부 얘기하는데서는 죄책감 느낀다는 사람도 많아요.
-전 사실 지난 해 초연때 공연을 보고 거울을 갖다 놓고 직접 비춰 봤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연극 대사처럼 겹겹이 싸여 있더군요. 차마 손가락은 못 넣어 봤지만. (다들 웃음) 제 친구도 그랬어요. 내가 지금까지 너무 홀대했구나하는…
-‘아우성’(아름다운 우리들의 성)이 지평은 넓혀 놓았지만 청소년까지 대상으로 하다 보니아무래도 쾌락을 이야기하기는 한계가 있었죠.
이 공연을 계기로 출산이나 여성수탈의 역사뿐 아니라 쾌락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었으면 해요.
-극중에서처럼 자위로 멀티오르가즘 체험이 가능할까요.
-이 작품이 기초하고 있는 여성학자 베티 다즌의 기본 이론이 ‘자위’ 이에요.
30대 중반 이상 되는 사람은 그 부분에서 눈물 쏟는 사람도 많아요. 속만 앓고 살아왔다는 얘기지요.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 보니 성에 대한 한국의 이중구조가 지긋지긋했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오히려 더 좋아질 것 같은데…극
중 대사처럼 모여서 ‘XX 워크샵’이라도 해야 할까 봐요. (일동 환호성)
-전 싱글이라 합법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하죠. 개인적으로 ‘자위’가 남자들의 그것처럼 양지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일동, “40대 무섭다”며 탄성)
-남자 친구는 제 성기를 좋아하지만 사실 전 싫었거든요. 제가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얘기지요. 이제는 자연스럽게 애착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해요.
(서주희씨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나도 이 작품을 할 건가요?”)
-아니죠. 그때쯤이면 이 소재가 커밍아웃했을 테니까, ‘자위’ 정도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가자들은 그들이 사용한 말이 그대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XX’나 ‘여성 성기’식으로 뭉뚱그린다면 연극과 토론이 무의미하고 은폐와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자는 취지가 사라진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기자는 신문은 누구나 읽는다는 점을 감안해 ‘XX’로 표기한다.)
■참석자
서주희(34ㆍ주연 배우) 임정희(45ㆍ미술 평론가) 박선형(33ㆍ대학원생) 가수미(31ㆍ대학원생)박혜숙(40ㆍ여성문화예술기획 사무국장) 박은숙(26ㆍ뮤지컬 배우) 권소영(26ㆍ직장인) 서지히(26ㆍ여성문화예술기획 간사) 이영란(35ㆍ설치미술가)송은주(37ㆍ무대의상 제작자)
■1인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1996년 미국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위노나 라이더, 수전 서랜든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거쳐간 화제작이다.
여성의 성기를 둘러싼 진지하고 유쾌한 담론을 인터뷰 형식을 통해보여주는 1인극. 5월 예술의전당 국내 초연(김지숙 출연) 당시 90% 이상의 관객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번 재공연은 송일곤 감독의 영화 ‘꽃섬’에 출연한 서주희가 맡았다. 16일 재개막했다. 내년 1월 13일까지 화~목 7시 30분, 금ㆍ토 4시ㆍ7시 30분, 일 4시 대학로 컬트홀. (02)516-1501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따뜻하고, 솔직한 독백을 쏟는다. 일방적인 분출이 아닌, 유쾌한 소통이다. 서주희가 열연하는 한 장면.
정리=양은경기자 k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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