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의 전업주부 배온누리(서울 종로구 평창동)씨와 36세의 싱글 최애숙(패밀리레스토랑 베니건스 대학로지점장)씨.배씨는 98년 1월에 결혼해 19개월 된 딸 지온이를 두고 있다.
최씨는 직장생활만 16년째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은 결혼과 일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 둘은 공존하기 어려운 것일까? 그것이 선택이라면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프로 주부가 되고 싶은 20대 중반의 결혼 3년차와 30대 중반의 독신 전문직,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일과 가정, 그 사이 어디쯤엔가서 고민하는 있을 한국의 2535 세대 여성들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 보았다.
최씨의 일터에서 첫 대면한 두 사람은 서로의 외모에 대한 가벼운 찬사부터 시작했다.
▲배=(자리에 앉자마자) 어머, 어쩜 정말 피부 좋으시네요. 그 나이라고 아무도안 믿겠어요.
▲최=(짐짓 싫지 않은 듯) 매장에서 제 나이 아는 사람 없어요. 밝히면 기절할까봐. 30대 초반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예요.
메뉴판이 오자 대화가 잠시 끊긴다. 배씨가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역시 아줌마?
▲최=가장 맛있는 걸로 해 줄게요. 내가 다 먹어 봤거든. 그런데 온누리씨, 그 나이에 결혼하고 애가 있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할 생각을 했어요?
일 대신 가정을 택한 배씨. 그녀에게 결혼은 아름다운 동화도, 드라마도 아닌 냉엄한 현실이었다.
▲배=휴, 얘기하자면 길어요. 아버지가 엄하셨어요. 친구들하고 놀고 싶어도 집에 아홉 시까지는 들어와야 하고… 그래서 빨리 시집가고 싶었죠. 처음부터 제 또래보단 당장 결혼할 수 있는, 나이 들고 직장있는 사람을 만난 거에요. 대학교 1학년 때 교회 성가대에서 남편(황성준ㆍ31ㆍ삼성탈레스 선임연구원)을 만났어요. 자기가 먼저 사귀자고 하더군요.
▲최=찜을 당했나 봐.
▲배=네, 딱 찍혀서 결혼했어요.
▲최=그럼 모든 게 계획대로 된 건가요?
▲배=결혼생활에 대한 환상이 컸던 것 같아요. 든든한 남편에 예쁜 아기에, 우아한 홈드레스 입고 뜨개질하면서…근데 그게 어리다는 증거예요. 보이지 않는 노력을 생각못한 거예요. 후줄근한 옷 입고 걸레질하고, 애기 기저귀 갈고…
▲최=직장생활 안 한 거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배씨의 가장 민감한 곳을 최씨가 찔렀다. 그래도 배씨는 후회보다는 만족이 몇 배는 더 커 보였다.
▲배=친구들 모여서 직장 얘기할 때는 좀 소외감이 들죠. 그렇지만 행복하다기보다는 숨가빠 보일 때가 더 많아요. 전 사실 지금의 상태가 너무 안정되어서 주저앉아버리지 않을까 걱정이예요. 남편이 이해를 많이 해 줘요. 친구들 만나는 것도 그렇고… 부모 된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은 때도 많아요. 애기가 방긋 웃으면서 볼에 뽀뽀하고 그러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지면서 그냥 녹아버려요.
가정 대신 일을 택한 서른 여섯 커리어우먼, 그러나 그녀는 결코 독신주의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다.
▲배=언니는 대학 졸업하고 여기 바로 들어오신 거예요? 결혼 생각은 없으셨나요?
▲최=학교는 고등학교까지 나왔고 9년 정도 현대산업개발에서 일하다가 그만 뒀어요. 여긴 서른이 넘어서 들어왔고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지점장이 됐지요. 물론 저도 남들처럼 20대 초반에는 사랑도 해 봤어요. 하지만 확신이 없어 망설이다가 스물 일곱, 여덟 계속 나이가 들어간 거예요.
▲배=집에서는 뭐라고 안 하나요?
이번에는 배씨가 최씨의 민감한 곳을 공격했다.
▲최=왜요? 거의 포기상태죠. 동생이 보다 안 됐는지 ‘언니, 내가 결혼정보회사에 대신 가입해 줄께’그러더라구요. 사실 남들은 눈이 머리꼭대기에 달렸다는 둥, 혼자 잘난 척한다는 둥 그러지만 저는 단지 시기를 놓친 것 뿐이예요. 아마 어릴 때였으면 더 쉽게 결정했을지도 몰라….
배씨가 “맞아 맞아”하며 백번 공감한다는 표정이다. 최씨는 일 이야기를 하면 활기가 넘친다. 흐뭇한 미소로 말을 이어간다.
▲최=문닫는 시간까지 700여 가지 결정을 내려야 돼요. 센스 있고 순발력 있게. 그게 참 스릴 있어요. 일이 늦게 끝나 새벽 두 시에 회식을 해요. 그 시간 세상이 얼마나 활기차게 돌아가는데요…
▲배=근데 정말 외롭지는 않으세요?
앗, 드디어! 최씨는 과연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긴장의 순간! 그런데 대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최=지금은 결혼 안 한 동생들이랑 아버지랑 살고 있어서 그런 거 별로 못 느껴요. 같이 여행이나 취미활동할 수 있는 젊은 친구들도 많고요. 물론 동생들 시집가면 난 고양이나 키우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땐 아마 일년 365일 출근할 거 같아요. 어른들은 ‘마흔 넘으면 초혼은 안 된다’는 얘기까지 하는데…뭐그때까지 혼자 살겠다는 것도,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죠.
일과 가정을 다 가진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는 정말 힘든 것일까. 두 사람은 여성이 일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 여건에 화살을 돌렸다.
▲최=사실, ‘결혼을 했으면 이자리에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같이 일하는 여자들 중에 시골 사는 시부모한테 애를 맡기고 한 달에한 번 보러 가는 사람도 있어요. 직장 근처에 육아방이 있고, 일하면서도 간간히 애 들여다 보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배=맞아, 남자들은 그런 실정 모를 거예요. 사실 저도 TV에서 아이 떼어놓고 일하는 엄마들 이야기 보고 운 적도 있었어요. 여자들 정말 불쌍해요. 저도 겪어 봤지만 입덧 때문에 한 달 넘게 속이 미슥미슥하고, 죽을 만큼 까무라치면서 애 낳고, 애 키우면서는 마음 놓고 아프지도 못하고…그러면서도 애도 못 보고 일해야 하잖아요. 그게 우리나라가 후진국이라는 증거야.
최애숙씨는 스물 다섯에 어떤 꿈을 가졌었을까. 또 배온누리씨는 서른 여섯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요리접시가 바닥을 드러냈다.
▲최=그땐 평범한 사무실 여직원으로 일하면서 어떤 꿈보다는 결혼 생각이 더 많았어요. 애 낳고 현모양처 되는 것. 하지만 지금은 기왕에 결혼도 안 하고 사는데 열심히 해서 올라갈 수 있는 위치까자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배=저도 천년만년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예요. 무엇이든 제 일을 찾아야죠. 출퇴근하는 직장보다 그림이나 연극, 음악 같은 예능 쪽에서 재능을 찾고 싶어요. 어려서 애 낳았으니까 빨리 키워 놓고 서른 전에 뭔가 시작해야죠. 둘째 아이는 당분간 생각 없어요. 부모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아니까.
/정리=양은경기자 key@ hk.co.kr
■최애숙
서른 여섯의 미혼, 그리고 패밀리레스토랑의 점장. 그는 평범한 회사원과는 달리 오전이 여유롭다.
오전 11시 30분쯤 출근해 오후 9시 30분이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다.
남들이 노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더 지독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 대신 일주일에 하루 평일에 쉰다.
모처럼 쉬는 날이면 더욱 바빠진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한다.
이런저런 세상구경을 할 수 있으니까 좋다. 백화점에서 제값 다 주고 옷사는 것은 좀 아깝다. 주로 할인매장을 이용한다.
한때 모자와 빨간색 립스틱을 미친 듯이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모자가 80개쯤 될까.
학창시절친구들은 만나기 어렵다. 대개 결혼해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전화통화 정도 가능하다.
독립은 하지 않았다. ‘결혼 안 한딸을 밖에 돌릴 수 없다’는 아버지의 주장 때문.
240만 원 월급 가운데 50만~70만 원은 생활비로 내놓는다. 10% 가량은 저축. 동생,조카에게 선물 사주는 것도 좋아한다.
자신만을 위해 쓰는 돈은 30만 원 정도. 운동과 책에 들어가는 돈이 요즘 많아졌다. 따로 학원을 다닐 시간이없기 때문에, 잠들기 전 꼭 몇 장이라도 책을 본다.
5개월 전부터 헬스도 시작했다. 따로 건강을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에서.
■배온누리
19개월 된 딸 지온은 생활을 180도 바꿔 놓았다. 엄마의 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이가 일어나고 놀고 먹고 잠자는 시간에 맞춰 하루를 보낸다.
아이가 낮잠자는 시간이 가장 여유로운 때. 주로 인터넷 서핑을 한다. 쇼핑도 하고, 회사 다니는 친구들과 채팅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인터넷 실력도 많이 늘었다. 카탈로그 모델일도 하고 문화센터나 대학사회교육원에서 홈패션, 서양화 데생을 배우기도 했지만, 요즘은 외출을 엄두도 내지 못 한다.
동네이웃들도 아이가 있는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
주말에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남편과 공연이나 영화를 보거나 분위기 좋은 재즈바에 가기도 하지만 드물다.
아이와 함께 외식하고 공원에 가거나 아이를 재우고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제권은 남편에게 있는 셈이다. 남편 월수입은 300만~400만 원 가량. 필요한 만큼 통장에 남편이 넣어준다.
그녀가 직접 쓰는 돈은 한 달 평균 100만 원. 아이에게 들어가는건 20만~30만 원 정도로 적은 편이지만, 교육비가 들기 시작하면 점점 더 늘어날 것 같다.
자신을 위해서는 옷이나 화장품을 사고 친구를 만날때나 쓴다. 식구가 적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대형할인매장에 가는 것으로 족하다.
오래 입을 옷은 백화점에서 사더라도 유행을 타는 건 시장에서 구입하고, 아이 옷은 사촌의 것을 얻어 입힌다. 참 알뜰하다.
프로주부를 꿈꾸는 25세의 아이 엄마와 35세의 싱글의 전문직 여성. 첫 만남이었지만 둘은 유쾌하게 서로의 꿈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름대로 빛과 그늘을 지닌 채.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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