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드므 다름 꼬 만느네 왈레 아-드미용 께 쉬까르 깰리에 바따끄레 레흐떼 행…”내가 야단칠 때마다 하녀 ‘라즈’는 지지 않고 제 나라 말로 종알거린다. 내게는 혀가 돌돌 말리는 소리로만 들린다.
라즈가 자기 목에 대고 손을 가로로 긋더니 먹는 시늉을 한다. 목이 잘린다?…먹는다? 이 아이도 괴이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린애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얘기하는 것 같다.
나와 영어로 말이 통하는 유일한 인물인 집주인 아줌마도 며칠 전에 근처 슬럼가에서 그런 일이 횡행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것도 다른 이야기가 와전된 헛소문이다. 내가 영자 신문에서 본 바로는 그 일은 며칠 전이 아니라 두어달 전, 명색이 수도인 이 도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가장 낙후된 산골 오지에서 일어났다.
마을에 병이 돌자 주민들이 부정한 일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기고 네살배기 아이를 희생 제물로 속죄의식을 치렀다.
텔레비전이 집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신문 보는 집은 더욱 드문 탓인지, 몇 달 전 뉴스거리가 소소한 첨삭이 가해져 소문으로 떠도는 경우가 많다.
“에싸 라그따 해 끼 앞-까 도스뜨 카야 자 쭈까 해. 유아 프렌드. 초따 프렌드.”
라즈는 답답한 듯이 고개를 젓다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뺨에 닿는 감촉이 무척 여리다. 갓난아이의 손 같다.
“프렌드?”내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다. 방학이라 유학생들은 다들 떠났다.
‘초따’라는 말은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단어 중 하나다. 작다는 뜻이다. 작은 친구? 자기? 자기가 내 친구다?
“뭐라는 거야? 바쁘다는 데도!”나는 라즈를 밀어내며 호통쳤다. 구박당하는 데 이골이 나서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눈웃음을 치는 이 아이가 징그럽다.
꾸중을 모면하려고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헛소리를 듣기에도 신물 난다. 역시 이 애는 내가 녹록하게 굴면 굴수록 점점 더 나를 우습게 본다.
나중에 귀국할 때 데려갈 것도 아니라면 하녀를 너무 허물없이 대하지 말라고 말해 준 사람은 학교 선배 ‘다모’이다.
잠시 머물다 갈 이방인 주제에 평생 이 나라의 신분제도 속에서 살아야 할 아이에게 공연히 헛바람을 불어넣지 말라는 얘기다.
다모가 내게 관공서를 안내해 주느라고 택시를 대절해서 우리 집에 들른 날, 라즈가 빨래하러 와 있었다.
자상한 선배이건만. 나는 어쩐지 그가 싫었다. 단 하루 만났던 그 날 벌어진 불쾌한 사건 때문이다. 공무원의 심술로 관공서에 헛걸음을 하고 맥없이 돌아오는 길에 다모는 약국에 들렀다. 위장병을 앓는 여자 친구의 약을 찾는다고 했는데, 특별한 약인지 여러 군데나 돌아다녀도 구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먹지를 못 해요. 자기가 뭘 먹고 있는 순간에도 세상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굶고 있겠거니 생각하면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질 않는다나요. 먹는 데 죄책감을 느낀대요. 본인도 그게 정상이 아니란 건 알아요. 먹어 보려고 애를 쓰긴 쓰는데 뭐라도 용케 삼키면 또 위가 경련을 일으킨다니…옆에서 지켜보기도 못할 짓이지요. 내 피가 다 마르는 것 같아요. 할 수만 있으면 내 살이라도 떼어주고 싶다니까요. 그녀를 여기 놔두고 혼자 훌쩍 떠버릴 수도 없고…”
“안티(아줌마)! 아줌마!” 다모의 담담한 얘기에 난데없이 청승맞은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길이 막혀 택시는 서 있고 차창에 꼬마 거지가 한 명 달라붙어 있다. 내가 동전 한 개를 주었는데, 거지가 손을 도로 내밀었다. 아이의 손바닥에 놓인 동전은 50페사 짜리였다.
1루피를 준다는 게 내가 실수로 50페사를 준 것이다. 그러나 구걸에도 가격이 있다는 아이가 밉살스러워서 나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여기 와서 처음에는 어디가나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거지들에 충격을 받았지만 차차 무감각해졌다. 앞길을 막는 거지들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걸어갈 수가 없고, 식당 유리창에 달라붙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한 입이나마 삼킬 수가 없고, 그들이 담 밖에 우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숨조차 쉴 수 없을 것이다.
“써르(아저씨)!써르!” 나머지 50페사를 기어이 보충하겠다고 꼬마는 차 뒤로 돌아가서 열린 차창으로 다모의 팔뚝에 매달려, 다모를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아무리 왜소하다지만 그래도 다모는 어른이니 흔들리는 쪽은 거지였다. 꼬마의 몸이 차 문짝에 턱턱 부딪혔다.
“녀석이…” 다모가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아이를 후려칠 듯 오른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짤로(꺼져)!”다모가 묵직하게 외쳤다. 하지만 아이는 겁을 먹기는커녕, 핼끔 다모를 올려다보더니 짜증마저 섞어 목청을 높였다. “써르으!”
놀란 건 나였다. 순간 다모의 얼굴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안색이 안 좋아 푸르죽죽하던 얼굴이 네온사인 바뀌듯 일시에 허옇게 바랬다.
그리고 눈동자가 노래지면서 오므라들고 입술이 면도날처럼 얇아졌다. 그는 묵묵히 차창 밑의 손잡이를 돌려 유리창을 올리기 시작했다.
키가 작은 거지는 다모의 팔뚝을 놓치자 서서히 올라가는 유리창에 매달렸다. 창틀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아졌다.
다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손잡이를 돌리고 있다. 아이의 손가락이 중간에 낀 채 유리창과 창틀이 맞붙었다.
“그만 둬요!”내가 소리쳤고 아이가 창에서 손을 뺐으며, 유리가 창틀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모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어느새 얼굴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표정했다. 택시가 부르릉 출발했다. 창 밖을 내다보면서도 나는 옆자리의 다모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여자 친구라는 사람은 이 남자 때문에 병이 났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모는 그 여자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한다지만, 그 여자는 다모 때문에 먹지를 못하게 됐을 것 같았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야 알 수 없어도.
관공서에 신청해 둔 서류를 찾으러 갔다가 나는 다모의 비자 연장 서류가 공무원의 책상 서랍 속에 쑤셔박혀 있는 걸 발견했다.
자기 서류가 접수조차 안 된 채 방치되어 있는 줄 모르고 다모가 비자 기한이 다 되도록 방심하고 있다가는 낭패를 볼 것이다.
그가 머물고 있다던 기숙사에서는 갑자기 퇴사했다고만 하니, 경황없는 일이 생긴 것 같다.
여자 친구의 병이 악화돼서 그녀의 집으로 옮겨간 듯하다. 다모와 내가 관공서에 다녀오던 날 그가 거기서 택시를 내렸으므로 나는 그 3층집을 안다.
모른다면 모를까 연락처를 알고 있으니 다모에게 다급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 메모를 적어 문 밑으로 밀어넣으려니 문과 바닥 사이가 몹시 좁다. 뭔가에 막혔는지 종이가 들어가질 않는다.
빼서 다시 넣어 보려다가 나는 메모지를 펼치고 내 이름과 우리 집주인 전화번호도 재빨리 써넣었다.
그리고 이사했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은 다모에게 전화 좀 해달라는 암시를 남긴 게 낯 뜨거워, 메모지를 문 밑으로 미끄러뜨리고 도망치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방학이라 유학생들이 모조리 떠나 외로운지, 성가신 일이 끝났는데도 홀가분하지가 않고 허전하다.
골목 모퉁이를 꺾어지다가 나는 멈춰 섰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 집 문 밑에 두 번째로 메모지를 밀어넣을 때도 같은 자리였다.
처음에는 뭔가에 막혔던 종잇장이 그땐 어떻게 미끄러져 들어갔을까. 나는 얄궂은 생각이 들었다. 문 저쪽 편에 서 있는 어떤 사람.
누구인가 문에 바짝 붙어서서 계단 쪽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틈으로 메모지가 발치에 밀려들자 뒤로 한 걸음 살짝 물러나는 장면.
나는 되돌아갔다. 역시 그랬다. 3층 현관문 밑에 끼여 보일락말락했던 메모지가 그새 사라졌다.
누군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집안에 사람이 있으면서도 없는 체 했던 것이다. 이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 사는 듯이 자기들끼리만 고립되고 싶어한다.
자기들끼리는 애틋해서 안달복달하면서 다른 사람은, 내가 눈 앞에서 죽어간다 해도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
거리의 거지들을 볼 때 내가 그렇듯이. 너무나 일방적으로 따돌림당하니 기가 죽는다. 나는 너무 비루하다.
삐비비비빅…. 3층에서 연달아 울리는 새소리 초인종이 내 귀에까지 따갑다. 돌아서려다가, 한번만 더.
나는 다시 그 집 앞에 서 있다. 우리 집주인네로 그 여자가 전화를 했다고 한다. 왜 다모가 아니라 그 여자가 전화를 했을까. 다모는 어디 가고 그 여자가 대신 응답을 하는가.
전화는 했을지언정 방문해 달라는 말은 없었는데도, 나는 발길이 돌려지질 않는다. “잠깐, 잠깐만요!”딸깍, 문이 문설주에서 떨어졌다.
초인종 좀 그만 누르라고 목청을 높여서인지 여자의 목소리는 뜻밖에 낭랑하다. 기운 없지도, 신경질적이지도 않다.
“…!” 숨이 막힌다. 문고리를 잡고 뒤로 물러섰다가 문을 제치며 앞으로 나서는 여자는, 그 느릿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내 예상을 단번에 압살해 버렸다.
세상의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음식을 목으로 넘길 수가 없고, 억지로 삼키고 나면 또 위가 경련을 일으켜서 도무지 먹지를 못 한다던 그 여자는, 그 가련한 모습을 지켜보기 안타까워 다모가 피가 다 마른다던 그 여자는, 살무더기다.
살에 덮여 얼굴과 상체와 하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러고도 살집이 남아 아무데나 올록볼록 접히기까지 한, 몹시 비만한 여자다. 문간이 꽉 찬다.
“다모씨가 이 나라를 떠난 건 확실해요? 그가 공항에서 나가는 걸 직접 보셨나요?”
“왜요?” 마침내 여자는 빙글거리지 못한다. 얼굴이 얼어붙는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어요.”여자가 등받이를 짚고 천천히 의자에 뭄을 내려놓는다.
끼이익, 의자가 경망스럽게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털썩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았다.
“외국인들 중에 정신적으로 방황하다가 밀교 같은 데 빠져서 본국과의 인연을 끊고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던데, 그럴 경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랫동안 목에 걸려 있던 말이 딸국질처럼 튀어나왔다. 여자를 처음 본 날부터 이 말이 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둘이 해볼 건 다 해봤다니, 그러면 당신들은 속죄 의식도 해봤느냐고.
너와 나라는 한 겹 경계마저 없이 서로 뒤얽히다 보면 문득 나오는 백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풀썩 나동그라지는 연애의 막장, 오직 자기들끼리만 맛 본 사랑의 절정에서 이 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리광이 심한 여자와 옹졸한 남자, 이 둘의 태울 대로 다 태운 연애를 나는 질투한다.
“어디서건 다모는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착한 사람이니까요.”
생크림에 파묻힌 블루베리처럼, 여자의 눈동자에 윤기가 돈다. 눈물이 어렸다. 여자의 얼굴은 희고 넓적하건만 말라 비틀어진 빵 같은 다모와 비슷한 인상이다.
여자는 두려워하고 있다. 다모가 꼬마 거지에게 화를 냈을 때도 그 표정은 분노가 아니라 공포였다.
그 꼬마만큼이나 여리고 무력해서, 그는 한 치도 양보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 겁먹은 어린 아이들이다.
오늘도 여자는 내게 자기 전화번호 말해주길 잊었다. 이 실종 사건의 결과가 별로 궁금하지 않고, 굳이 나한테 들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여자는 알고 있다. 지금 다모가 어디 있는지. 여자는 끝내 이사는 못 갈 것이고 언제까지나 여기서 울고 있을 것이다.
“제발, 제발 내 얘기를 들어줘요! 나는 속죄하고 싶어요! 누군가한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여자가 소리쳤다.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나는 별안간 다모의 소식을 들을 용기를 잃었다. “아뇨. 말하지 마세요.”
“고해를 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다모와 나는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이에요. 우린 졌고 밀려났어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쌓인 울분과 원망을 우리는 서로에게 퍼부었어요. 다른 사람한테 풀지 못한 한을 가장 나약한 상대인 서로에게 풀었죠. 약하다는 게 얼마나 추악한지 아시나요?”
내가 듣건 말건 여자는 저주 같은 말들을 내 귀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제기랄!” 구역질이 나는데도 나는 전화를 끊을 수가 없다. 관자놀이가 파이도록 수화기를 귀에 누르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가장 인정하기 싫은 자기 모습을 보았죠. 그는 나였고, 나는 다모였어요. 나랑 똑같은 사람이 타인으로 존재한다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결점 많은 모습을 증오하게 돼요.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죽이고 싶도록 미워져요. 똑같은데도 우리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둘이고, 그는 다모이고 나는 나였기 때문에, 한쪽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서로 계속 물어뜯을 수밖에는 없었어요. 그렇지만 다모도 나도 서로를 잃고 싶지는 않았어요. 상대방이 바로 자기 자신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우리는 헤어질 수도 없고 화해할 수도 없었죠. 같이 죽는 것만이 서로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죠. 우리가 너와 나라는 두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같이 죽을 수는 있어도 같이 살 수는 없었던 운명을 반복하지는 말자고요. 인간으로 태어나거든 두 명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짐승이 되어도 한 마리로, 나무가 돼도 한 뿌리에서… 속이 끊어지는 것 같아 깨보니 다모가 방바닥을 뒹굴며 신음하고 있었어요. 어느샌가 ‘다 내 탓이야’가 ‘너 때문이야’로 바뀌어 있었어요.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그는 목소리를 쥐어짰어요… 다모와 같이 죽지 못해서 한 몸이 되지 못한 죄, 그게 내 죄예요. 다모는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우리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어요…”
비로소 나는 다모를 내 마음 속에서 놓아주었다. 가라, 가서 흰 머리가 생기도록 오래 끈 성인식을 마감하라!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남의 살로 키워져서 남을 죽여 배를 채우고, 남의 새끼를 죽여 제 새끼를 키우는 다 자란 수컷 혹은 암컷으로. 남을 죽이고는 미안해하고, 미안하지만 또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죄 많은 성인으로.
누군가 비누방울처럼 퐁퐁 계단을 날아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내다보니 옥상 문이 열려있다.
라즈가 옥상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 있다. 한 달 전에 그 어머니와 함께 야멸차게 해고해버린 후로는 보지를 못했다.
아이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날아드는 새들에게 모이를 뿌려준다. 하녀답게 고분고분하다. 이 아이는 이제 내가 자기 친구가 아니라 고용주라는 걸 확실히 안다.
“라즈…미안해.”나는 속삭였다. 영어로 하면 혹시라도 아이가 알아들을까봐 우리말로 혼자 중얼거렸다.
나도 속죄하고 싶다.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사랑과 혐오의, 존경과 멸시의, 신뢰와 의심의,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른들은 다 알면서 자기들끼리만 고개를 끄덕이는 그 경계선.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 남인지.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내 가족이며 친구, 동지, 동포, 내 계급, 내가 먹여줘야 하고 아프면 돌봐줘야 하며, 죽으면 가슴을 치며 울어주어야 할 내 편, 내 사람들인지.
누구는 남, 아파도 내가 책임질 필요 없고 죽어도 내 가슴에 아무 느낌을 남기지 않는 사람들, 나 자신이나 내 편을 위해서 죽여야 할 적,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할 악마들인지.
그 경계선은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가.
그런데 아이가 알아들은 것 같다. 라즈가 다가와 머뭇거리며 손을 내민다.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갸웃하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바쩨 끼 따라흐 앞-께 도스뜨 까 초따 샤리르 앞-께 히…” “라즈, 무슨 말인지 난 몰라.”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라즈가 자기 목에 대고 손을 가로로 긋더니 먹는 시늉을 한다. 예전에 우리집에 와서 날마다 하던 그 짓이다.
아이의 빠른 말이 자빠진 자루에서 쏟아진 구슬마냥 내 귀로 다글다글 굴러 들어온다.
“에싸 라그따 해 끼 앞…까 도스뜨 카야 자 쭈까 해. 유아 프렌드. 초따, 초따 프렌드.” 라즈가 손바닥으로 제 머리 위 허공을 누르는 시늉을 한다. 초따 프렌드, 작은 친구.
“라즈! 다시 말해 봐!”나는 아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해독할 수 없는 자음과 모음으로 내 머릿속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단어들이 ‘작은 친구’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어 한 구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 말은 내 왜소한 친구, 다모를 뜻하는 말이었다. ‘어린애처럼 자그마한 그 남자가 얼굴이 누런 여자한테 잡아 먹혔다, 너랑 비슷하게 생긴 동양인 여자가 몸집이 작은 네 친구를 잡아먹었다.’ 라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한낮의 열기가 가시자 사람들이 온통 길바닥에 쏟아져 나왔다.
시장통에서 누군가 올려 본다면 옥상에서 내밀어진 내 얼굴은 악마가 들어오지 말라고 걸어놓은 부적, ‘끼르띠무카’처럼 보일 것이다.
울고 있는 끼르티무카, 남한테 잡아 먹힐까 봐 두려워서 남을 먼저 삼켜버리려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남을 먹고 살아 남아 그 피식자의 운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포식자로.
*이 글은 작가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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