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란 결국 남 얘기하며 사는 직업, 하지만 그러다 보면 한번 쯤은 제 얘기를 하고도 싶은 법이다. 본분은 아니지만 마침 늦가을의 꾸물꾸물한 날씨도 심란함을 풀어내기에 제격이다.최근 언론 자신이 하도 자주 부끄러운 다툼에 말려들어 뭣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것들이 있다. "갖가지 게이트 다 어디로 갔나." "폭로전은 선거용?" 한 미디어비평지 기사의 리드다.
'이용호 게이트'니, '분당게이트'니 하는 것들이 국회 재·보선이 끝나자 지면에서 사라졌음을 꼬집는 내용.
같은 비판이 일부언론학자나 시민단체, 독자에게서도 나온다. 언론이 정치권의 선거전략에 놀아났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런가. 우선 이용호 게이트는 우리 사회부기자들이 특종한 사건이다.
검찰에 연행된 이씨가 전에 같은 혐의로 조사받고도 하루만에 귀가조치된 사실을 밝혀낸 게 계기가 됐다.
이전부터 증시 등에는 관련설(說)이 끊이지 않아 어찌보면 점화의 계기만 남은 상황이었다는 점도 부연해야겠다.
정치권의 가세가 없었더라도 보도과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리라는 얘기다. 분당 게이트는 연전에 일부언론에서 썼다가 반향을 못 얻은 것이긴 하지만, 중앙 정치권에서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새삼 취재가 시작된 것이다.
내친 김에 우는 소리도 하자. 언론은 진술을 강제할 권리도 없고 사건기록 열람을 요구할 수도 없다.
대개의 독직사건에서 최종 확인수단이 되는 계좌 추적권 등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실'을구성하기 위해 기자가 기울이는 노력은 공권력을 가진 수사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숱한 정황과 주변 진술을 모아 가장 개연성있는 상황을 추론해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핵심을 짚었어도 당사자가 부인하면 도리가 없다. 말하자면 누군가 입증자료를 몽땅 들고 양심선언이라도 하지 않는 한 똑 부러지게 결론을 내릴 방법은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들 보도가 뜸한 것은 선거가 끝나고 의혹이 당초부터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론에서 제기한 모든 의혹들에 대해 반향이 없기 때문이다.
제기된 의혹에 대해 답해야 하는 것은 물론 수사기관이다.
탐사보도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워터게이트사건을 되짚어 보자. 언론계의 신화가 된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 역할 역시 엄밀하게 보자면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모아 끈질기게 정치스캔들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그들도 "근거없고 무책임한 정치공세" 비판에 시달렸음은 물론이다.
몇 차례 의혹제기 이후 사건의 진실은 연방 대배심의 재판과 특별검사의 수사과정에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일본수상의 금권정치를 파헤치고 록히드사건 의혹을 제기한 일본의 대표적인 탐사보도작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도 마찬가지. 그가 주변 자료를 모으고 관련자 진술을 들어 제시한 여러 의혹들은 국회 청문회와 도쿄(東京)지검을 거쳐 확인돼 갔다.
의혹제기야 말로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검찰의 입장은 여전히 완강하다. "의혹이나 설(說)로는 수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더 나아가 면책특권 제한이나, 특검제 위헌 주장까지 하는 판국이다. 언론보도가 주춤해 지면서 이번에는 해당 언론사를 상대로 한 사건 당사자들의 고소가 줄을 잇고 있다.
애당초 수사결론이 없는 상태니, 유난히 엄격한 우리의 판례로 보아 언론이 난데없는 증거자료를 내 놓지 않는 한 곤경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자, 그러니 한번 물어 봅시다. 시중에 떠도는 의혹조차 제기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언론은 뭘 해야 합니까.
확정 판결문이나 검·경이 '골라서' 손 댄 사건의 발표문만 실을까요?
/이준희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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