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른들은 그 소리를 ‘곡마단 나팔소리’라고 했다. 공연에 말(馬)을 본 적이 없는데 왜 곡마단이라고 불렀을까. 그들은 하천가 자갈마당에 천막을 치고 관객을모았다. 그 큰 천막 속의 시간은 고스란히 내 뇌수속에 저장돼 있다.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공연장이었다. 1950년대 후반 유랑서커스단은 한마디로 온갖 잡동사니 볼거리로 가득 차 있었다.
1부는 주로 노래와 춤이었는 데, 가요 민요 외국가요 등 레파토리가 다양했고춤도 캉캉탕춤에서 장고춤까지 있었다. 2부에서는 20~30분짜리 촌극을 두편 공연했다. 한편은 비극, 다른 한편은 희극이었는데 무조건 울리고 웃긴다는 공연목표가 분명했다.
이렇게 무려 2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3부 서커스가 펼쳐졌다. 동물쇼에서는 아기코끼리가 통위에 서서 비스켓을 받아먹고, 쇠사슬에 묶인 원숭이가 슬픈 몰골로 재주를 피웠다.
그 다음은 마술. 소녀가 통안에 들어가 반 토막으로 잘리기도 하고, 신사의 손수건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르기도 했다. 그러고 마지막으로 공중 줄타기가 대미를 장식하는 데, 간혹 공중에서 그네타던 소녀가그물망속으로 떨어질 때는 내 가슴도 철렁 내려 앉았다.
그 열댓살된 소녀는 땀이 마르지 않은 타이즈 복장 그대로 객석을 돌며 사진을 팔았다. 지금돈으로 3,000원쯤 됐을까? 나는 그 때 산 사진들을 방벽에 붙여놓고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소녀는 만능 엔터테이너였고, 나는 그 소녀의 열령한 팬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어린 소녀가 공중그네를 타는 것만도 신기한데,1부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고, 2부에서는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누이였다. 한국의 유랑 이동 서커스단원들은 대부분 그랬다.
노래하고 춤추고연기하고 마술하고 서커스까지 섭렵한 만능 재주꾼들이었다. 나는 프랑스에서 징가로의 곡마쇼를 보고, 러시아에서 서커스를, 독일에서는 카바레 드라마라는 광대쇼를 보았지만, 그들처럼 다양한 재주를 보여주는 곡예단은 없었다.
무엇보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말없는 눈길이었다. 천막이 세워지던 날부터 철거하는 날까지 똑같은 사진을 사면서 말을 걸었지만 소녀는 한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눈길에서는 궁핍과 외로움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나왔다.
당시 한국의 유랑 이동 서커스단은 빈약한 수준이었음이 틀림없다. 노래와 춤도변변치 않고, 30분짜리 촌극 공연은 기존 신파극이나 만담을 흉내낸 것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무대는 초라했고 의상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소녀의 타이즈 종아리 부분이 기워져 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무엇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열악한 상황속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고 줄을 탔고,무대 밖에서는 결코 일상인들과 말을 건네지 않는 의연함 속에서 공연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킨 프로들이었다.
무명 공연예술가들의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꿋꿋한 자존심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그들은 더욱 깊게 각인되는 추억의 인물들이다.
/이윤택(李潤澤)ㆍ극작가ㆍ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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