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검사’가 돌아왔다.25일 서울 동대문 을 재선거에서 금배지를 다시 단 한나라당의 홍준표(洪準杓) 당선자는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15대 총선 때 서울 송파 갑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으나 1999년 3월 선거법 위반 확정판결을 받아 낙마한 불명예를 2년여 만에 회복했다.
그의 인생 역정은 TV드라마 ‘모래시계’ 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그의 학창시절 별명은 ‘무계(無稽)’. 생각하는 것이 너무 황당하다는 의미에서 친구들이 붙여준 것이다.
경남 창녕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4전5기 끝에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검사가 된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황당하게’ 권력층 비리에 맞섰다. 6공 초 ‘5공비리’ 수사 당시 노량진 수산시장 사건을 터뜨렸고 ‘통제할 수 없는 검사’라는 꼬리표가 줄곧 붙어 다녔다.
그러나 1993년 서울지검 강력부 근무 당시 문민정부의 사정 바람을 타고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면서 ‘6공의 황태자’였던 박철언(朴哲彦)씨를 비롯한 실력자들을 잇따라 구속, 유명세를 탔다.
‘DJ비자금’을 물고 늘어져 ‘DJ 저격수’라는 독한 별명을 얻을 정도로 현정권과 ‘악연’을 쌓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두터운 신임으로 동대문 을의 공천을 따 재기에 성공, 당에 귀중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1992년 광주지검 근무 당시 여운환(呂運桓)씨를 구속시킨 과거의 경력이 ‘이용호 게이트’의 바람을 타며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용호 게이트’폭로에서 너무 나가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최고위원이 여운환씨를 면회했다고 주장했다가 한 최고위원으로 고소를 당하는 등 ‘무리수’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워낙 모난 스타일이어서 주위의 질시도 많고 언론플레이에 능하다는 평도 받는다. 검찰 선배인 정형근(鄭亨根) 의원은 “홍준표가 없어서 16대에선 (여당 비난을)쉬었다”고 말할 정도로 홍 당선자와 가까운 사이.
검사출신이 선거법을 어겨 의원직까지 박탈 당한 전력도 달갑지 않은 이력이다. 동대문 을에서 제2의 정치인생을 시작한 그가 ‘저격수’ 등의 껄끄러운 별명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태희기자
taeheelee@hk.co.kr
■끝내 울어버린 최명길
25일 김한길 후보가 서울구로 을 재선거에서 패배하자 부인 최명길씨는 누구보다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다.
김씨가 후보로 내정됐을 즈음 만삭이었던 최씨는 부랴부랴 지역구 내의 고려대 구로병원으로 옮겨 둘째 아들을 낳았다. 출산한 지 한 달이 안 돼 그는 거리로 나섰다. 만나는 주민마다“산후조리도 못하고 몸 상하면 어쩌려느냐”며 부기가 덜 빠진 최씨의 선거운동을 만류했다.
그래도 “최명길남편이 후보라면서?”하며 최씨를 먼저 알아보는 유권자들 때문에 그는 편히 집에 있지 못했다. 선거캠프에선 “김한길을 뽑으면 탤런트 최명길을 동네에서 매일 볼 수 있다”고 은근히 표심을 자극했다.
최씨는 앞머리에 꽂은 머리핀,수수한 티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평소 도회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구로 댁’으로 훌륭히 변신했다.
유세 때면 김한길 후보와 포옹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청중의 호응을 유도, 바람몰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오죽했으면 “되면 최명길 덕, 안 되면 김한길 탓”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을까.
그러나 구로는 최씨를 ‘구로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25일 밤 개표장이나 선거대책본부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남달리 애쓴 만큼 낙선의 아픔이 컸던 탓이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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