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수(42) 감독에게는 영화 ‘게임의 법칙’(1994년)의 신화가 남아있다. 아마도 그 신화는 남성적 우직함과 묵직한 이야기로 드러내는 냉엄한 현실일 것이다.그러나 이후 ‘본 투 킬’과 ‘남자의 향기’가 실망만 안겨주었고 박중훈이 비슷비슷한 코믹 이미지를 반복할수록 그 신화는 점점 아득한 추억으로 남는 듯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장현수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그가 그 신화를 멋지게 재현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3년 만에 돌아온 그는 그러나 그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때문에 ‘라이방’은 충격적이다. 그렇다고 “장현수가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라는 배신감이 전부는아니다. “장현수에게 이런 재주가 있다니”하는 놀라움도 있다.
‘게임의법칙’과는 정반대로 가볍고 코믹한 일상으로 세상을 꼬집는 재치. 그것이 저예산 영화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건, 흥행을 의식한 시류의 영합이건, 아니면 감독의 변신이든, 분명 새로운 발견임에는 틀림없다.
‘라이방’은 웃긴다. 삼류 인생이 좌충우돌하고, 과장된 캐릭터들은 나름대로 현실의 아픔과 일상을 코믹하게 연출한다.
철모를 때 실수로 낳은 여고생딸과 사는 학락(최학락)은 현실의 탈출구로 ‘베트남’을 고집하고, 낙천적인 해곤(김해곤)은 한의원에서 일하는 옌볜 처녀와의 사랑을 갈망한다. 대학물을 먹은 소심한 성격의 준형(조준형) 가정은 불화가 끊일 날이 없다.
같은 회사 택시를 운전하는 30대 후반의 이 ‘세친구’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처럼 점점 비참해지는 현실과 작은 꿈마저 잃어가는 아픔을 내면화하지는 않는다.
끝없이 감정을 드러내 웃음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그것을 위해 더욱 그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학락의 딸은 아버지를 버리고 음악공부를 시켜준다는 미국 단체로 들어가려 하고, 옌볜 처녀는 돈 많은 늙은이의 후처가 되려 한다.
무능력자인 형은 준형의 실낱같은 희망까지 앗아간다. 그것도 모자라 택시회사 전무가 그들의 돈을 빌려 도망치게 만든다.
이래도 가만히 있을래. 당연히 그들을 도둑으로 만드는 마지막 모험을 시도하고, 그 모험으로 또 한 번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고는 ‘억세게 재수 없는 사나이들’은 이 땅을 훌쩍 떠난다.
‘라이방’은 그들과 주변인물, 다양한 택시 승객들을 통해 세태를 풍자하고, 황금만능주의가 판 치는 우리 사회와 결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삼류인생을 반복적으로 비판한다.
지식인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경멸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날카롭게 느껴지기에는 가볍고 통속적이며, 은유적으로 되새김질 하기에는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의도적으로 ‘돈’에 너무 집착한 것도 영화를 단선적으로 흐르게 한다.
그래서 김해곤의 능청스런 연기에 감탄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우화 ‘라이방’. 이런 느낌도 프로인 장현수 감독의 영화란 사실 때문일까.
만약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면? ‘라이방’은 한때 선글래스의 대명사인 ‘레이밴(Ray Ban)’의 베트남어로 따가운 삶을 잠시라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의미한다. 3일 개봉.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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