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부터 주부, 심지어 노인들까지 편치 못하게 하는 영어 강박증의 원인은뭘까. 전문가들은 “영어에 대한 관심이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최근의 이상열풍은 과거보다 훨씬 절박한 이유에서 비롯됐다”는데 대체적으로 공감한다.우선 쉽게 지적되는 것이 인터넷과 경제의 글로벌화.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80% 이상이 영어로 돼 있어 영어를 못하면 지식정보사회에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소위 ‘국경없는 경제시대’를 맞아 외국인과의 직ㆍ간접 교류가 일상화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에 목을 매는 사연은 세대별, 개인별로 각양각색이다.
조기영어교육 붐은 부모들의 막연한 기대의식에다 특유의 유난스런 ‘바람’ 탓. 여섯살 짜리 아들을 2년째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정모(37ㆍ여·서울 서초구 서초동)씨는 “영어를 해두면 초등학교 생활이 훨씬 편해질 것 같아서”,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지난달 호주에 보낸 디자이너 박모(42ㆍ서울 광진구 구의동)씨는 “주위에서 한살이라도 어릴 때 외국에서 제대로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들 해서”라고 말했다.
더구나 교육당국이 “사교육비를 줄이는 지름길”이라며 1997년부터 시작한 초등학교 영어교육은 오히려 영어 과외열풍에 결정적으로 불을 당긴셈이 됐다.
대학생 이상의 성인들은 아무래도 현실적인 이유가 강하다. 영어를 못 하고서는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힘들고, 설사 취직을 했다해도 직장생활 이 순탄치 못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실제로 업무성격 등과는 전혀 상관없이 상당수기업이 입사나 승진조건으로 무턱대고 엄청나게 높은 토익 및 토플점수를 요구하고 있다.
공무원들도 영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 통계청 등 일부 정부 부처가 이미 지난해부터 영어실력이 일정수준에 미달하면 서기관 사무관 등 승진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국방부는 2003년부터 장교 진급심사에 영어능력을 의무적으로 반영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요즘에는 고령화 및 이민바람을 반영이라도 하듯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주부, 노인 등의 영어열풍 가담도 만만치 않다.
내과 개원의 K(40)씨는 “내년 5월중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위해 월 50만원을 주고 6개월째 외국인으로부터 개인 레슨을 받고있다”고 귀띔했다. 서울 종로의 한 영어학원 미국인 강사 L(40)씨는 “수강생이 작년에 비해 30%가량 늘었는데, 60세이상 노인이 5명, 주부는 족히 50명을 넘는다”고 전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영어때문에 "주부도 머리아파"
그렇다면 주부들은 영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까?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당사자가 아닌 자녀들 때문. 가정마다 영어교육 문제로 전쟁을 치뤄지는 판국이다.
지방 소도시 농부의 아내 이경숙(38)씨도 예외가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딸과 1학년 아들이 함께 영어과외를 시켜 달라는데 걱정이 태산같아요. 장래를 보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무슨 수로 과외비를 댈지.”
주부 정모(40ㆍ서울 성동구 성수동)씨는 초등학교 5학년 딸과 눈 맞추기를 애써 피한다.
딸이 “올 겨울방학에는 해외 어학연수를 보내달라”며 마냥 조르기 때문. 정씨는 “월 250만원 남짓한 남편의 봉급으로 300만원에 육박하는 연수비를 마련하기란 쉽지않다”며 “그렇다고 안보내면 딸이 기가 죽을 것 같아 이래저래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인터넷 어린이 백화점 ‘인터나루’가최근 유아 및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회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자녀의 영어교육 문제로‘매우 고민한다’는 대답이 30.9%, ‘고민하는편’이라는 응답은 59.1%로 각각 나타났다. 부모 10명중 9명 가량은 자녀 영어교육으로 골머리를앓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상당수 부모들은 ‘오직 영어를 위해’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건만 허락되면 보내겠다’는 응답이 68.6%나 된 반면 ‘국내에서 해결하겠다’는 29.5%에 불과했다.
최근 여성전용 인터넷사이트에 생기고 있는 주부영어 동호회들도 이런 스트레스의한 반영이다. 마이클럽닷컴의 소모임 ‘주부들을 위한 영어의 모든 것’의 주축은 어린자녀를 둔 주부들.
회원 박모(38)씨는 “사이트를 통해 하루한마디씩 영어표현을 배우거나 채팅방에서 영어 스무고개를 하면서 단어와 각종 표현법을 익힌다”며 “중학 1년, 초등 5학년 자식들 앞에서 한심한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가입동기를 밝혔다.
한림대 전상인(全相仁ㆍ사회학)교수는 “영어문제를단순히 언어교육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한 부모들의 영어 스트레스는 앞으로도 줄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가구당 평균 1.3명인 만 3~12세 자녀들의 영어과외비가 1인당 월 10만원을 훌쩍 넘고, 조기유학 등 사회계층별로 ‘영어 외압’에 대한 대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실은 경제침체와 고실업 시대를 감안하면 대단한 출혈입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국내 영어산업 현황
‘영어산업’은 국내 경기침체가 심화하면 할수록 오히려 호황을 누리는 이상업종이다. 취업난과 상시 기업구조조정의 칼바람을 이겨낼수 있는 가장 필수적이고도 효과적 수단이 바로 영어인 까닭. 여기에 지난해부터 일기 시작한 조기 영어교육 열풍까지 가세해 학원, 교재, 각종 시험응시료, 해외연수 알선 등을 합친 영어산업의 연간 시장규모는 최소한 1조원은 거뜬히 넘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추산이다. 이는 국내 대표적 공기업중 하나인 한국통신의 연 매출액과 맞먹는 액수다.
학원수만 보더라도 지난해말현재 전국에 2,944곳이 개원중이라는 교육부의 공식 집계가 나와 있지만, 일선 관계자들은 올들어 1만곳이 넘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민병철어학원 강남점의 김홍준(金弘俊) 총괄이사는 “지난 연말부터 조기 교육붐을 타고 영어전문 학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보습학원까지 더하면 2만곳 가까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들학원 가운데 서울시내와 지방에 분점을 둔 파고다, 시사, 민병철 어학원 등 ‘5대 메이저’ 영어학원의 연 매출액은 총 1,000억원대.
또 교보문고에 따르면 10월현재 시판중인 영어 교재(사전 제외)는 무려 9,616종으로, 2,000억~3,000억원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영·유아 영어 교구재 및 토플, 토익, 텝스등 이른바 ‘3T 시험시장’은 최근 1~2년간가히 폭발적 성장세를 보인 분야. 만2세부터 4세의 유아들이 집에서 놀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장난감, 단어카드, 스티커, 비디오 등 교구재시장은 2,500억~3,000억원으로 1999년의 2배가 넘었다.
3T 시험에는 지난 한해동안 84만명이 응시해 약 350억원이 시험료로 지출됐다.예전과 다른 점은 응시자수 급증 외에도 대학입학시 가산점을 받기 위한 중고생과 회사에 자신의 영어능력을 입증하려는 직장인들이 대거 몰리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 같은 액수는 어디까지나국내 시장에 한정한 것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유행을 타고 있는 장단기 해외연수 비용도 포함시켜 범위를 외국으로까지 넓힐 경우 총 규모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여행사 등 관련 업계에 따르면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해 보통 3주에 300만~450만짜리 영어 연수를 떠나는 학생과 일반인이 쏟아붓는 비용만도 한해 1,000억원에 육박한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학교 영어교육 효과는?
“한국인의 영어 실력을 망친 책임의 90%는 현행 공교육이 져야 한다.”
올해 초 서점가의 화제를 모은 자전 에세이 ‘잉글리쉬드림’의 저자 최정희(崔政希ㆍ60)씨의 주장이다. 최씨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주한 미대사관에서 30여년을 근무하고도막상 미국에 가선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데 충격받아 영어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지금은 미국 이민관 시험에 합격할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춘 최씨는 책에서 한국의 영어교육이 오류투성이였고, 그걸 따라한 대가로 수십년을 허송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체험을 술회하고 있다.그는 초등학교의 영어를 원어민에게 맡기는 철저한 이중 언어교육을 제안한다.
그의 논리에 이견도 있지만 현행 학교 영어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교사와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교사 김모씨의 말. “수업시간에 영어 교과서를 참고하지는 않습니다. 원어민들이 잘 쓰지않는 표현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이런 내용으로 현지 영어를 가르친다는 건 불가능하지요.”
교육부의 의뢰로 초등교사 영어연수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종남(金鐘南·강남대 교수) ESP연구소장은 “처음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실시되던 1997년 무렵에는 교사들의 영어학습 의욕이 대단했지만 제대로 된 지원이 없자 이제는 시들해졌다”면서 “교사들의 서투른 영어가 아이들의 영어 실력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또 “새로 개편된 7차 교육과정에 따른 영어 교과서도 학생수준별이 아닌 학년 단위로 이뤄져 있고, 내용도 여전히 독해와 문법 위주”라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은 상급학교에도 이어진다. 이모 고교교사 역시 교과서 내용을 문제 삼는다.비실용적 문장에다 분량도 소화하기 힘들만큼 많다는 것. “이런 교과서 문장을 칸칸이 비워놓고 채우라는 게 바로 대입시험문제이니,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울 수 있겠어요?”
베스트셀러 ‘슬랭도 영어다‘의저자 백선엽(白善燁)씨는 “전문가와 현장 영어교육 담당자들이 참여하는 영어교육 개선위원회를 만들어 그간 논의된 개선안을 정리해 시간을 두고 시행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남 소장은 “영어교육의 성패는현장 교사에게 달려있으므로 무엇보다도 교사의 영어 실력을 높여야 한다”며 “교육부와 교사가 공동부담하는 6개월~1년 장기연수 제도입, 교사의 영어학원 수강료 지원, 영어로만 말하는 가칭 외국인촌(English Village Society)을 설립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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