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사람 이름을 보통명사처럼 풀이하는 사전이 있다면,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작가 조 상(44)씨는 이렇게 설명돼 있을 법하다.1. (약)조상욱. 2. 난해한 현대물리학을 부호와 그래프를 통해 캔버스에 담는 작가. 3. 그러나 이렇게 그린 그림이 동양 산수화처럼 보이는 작가. 4. ☞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노자. 장자.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금호미술관(02-720-5114)에서 9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조씨는 여러 얼굴을 가진 작가다.
전시작 30여 점은 같은 작품이라도 볼 때마다 달리 해석된다. 물리학의 각종 기호와 데이터를 단순화한 작업 같기도 하고, 동양적 산수를 큼직하게 펼쳐놓은 작업 같기도 하다.
세로 260㎝, 가로 390㎝짜리 대형 그림 ‘무제’(2001년작)를 보자. 스펙트럼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원자가 전자파를 산란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러나 다시 보면 빠르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린 전통수묵화‘관폭도(觀瀑圖)’가 아닌가. 폭포수에 의해 젖은 검은 암벽이 전시장을 눅눅하게 만들 것 같은 느낌이다.
같은 크기의 또 다른 2001년 작 ‘무제’도 마찬가지다. 분홍색 물감을 칠한 분홍색 캔버스 6개를 이어 붙였는데, 그려진 것이라고는 단 4개의 직선뿐이다.
X축과 Y축, 그리고 Z축으로 이뤄진 3차원 공간에서 몇 개의 분자가 상호충돌 후 여러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물리학 도표. 그러면서 텅 빈 창호 문을 연상시키는 차분한 느낌의 동양화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펄스,그래프, 스펙트럼, X축과 Y축, 상대성이론, 불확정성 원리 등 현대물리학의 온갖 부호와 개념이 등장한다.
그가 갖고 다니는 스케치북에는 ‘두개의 서로 다른 기준계에서 본 탄성충돌’ ‘핵분열로부터 나오는 파편들의 질량수 분포’ 같은 난해한 내용이 그래프와 함께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있다.
그러나 다시 보면 그의 그림은 검은 암벽 사이로 떨어지는 흰 폭포이자, 짙은 안개에 휩싸인 거대한 산이다.
사물의 상대성과 불확실성을 규명한 현대물리학이, 여백을 강조한 전형적인 수묵산수화로 변신한 이 놀라운 역설.
그렇다면 작가는 동양적 산수를 서양적 사고로 풀이한 것일까, 아니면 서양적 사고를 동양적 산수로 그려낸 것일까.
작가는 “눈에 비춰진 사물과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다 보니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이 아니라 진동하는 에너지의 파장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이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그림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홍익대동양화과와 뉴욕대 대학원 졸업.
/김관명기자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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