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 채택문제가 심각할 때 친하게 지내는 일본인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일본의 역사교과서 채택 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마 일본의 진보적인 교원들의 분위기로 볼 때 교과서 채택은 1%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문제의 교과서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곧잊어버릴 것이다. 이 때 야스쿠니 신사참배나 교과서 문제로 외교적 비난을 받은 고이즈미 총리는 몇 달 동안 냉각기를 가진 후 한국을 방문할 것이다.그러면 양국 정치 지도자들은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에 몇 마디의 수사를 섞어서 유감을 표시하고 한일관계를 원 상태로 되돌릴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핵심은 일본의 민족주의적 보수화의 위험성이다. 이를 저지하기에는 일본 국내 지성인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달라는것이 그의 부탁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고이즈미 총리가 교과서 파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 방한을 하게 되었다. 일부 사회단체를 제외하고 언론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눈이 팔려 그의 방한에 주목하고 있지 않다.
성질 급한 한국인들이 쉽게 지난 여름 일들을 잊어 버린 것으로 일본에서는 이해할 수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의 현실주의 보수 정치가이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어두운 과거를 씻고 보통국가론을 주장하는 일본 보수주의 정객들은 일본이 패전 후 맥아더사령부의 군정을 거치면서 민족적 자학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미래의 젊은이들에게 자랑스런 일본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고 국제사회에서 자신감을 키워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다
.일본의 노벨 문학수상자 오에 겐사부로가 잘 지적한대로 그런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세계화의 시대에 일본 젊은이들을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로 만들어 시대를 거슬러 살게 만들 뿐이다.
그런 역사관을 가진 젊은이들이 앞으로 몇 십년 후에 세계무대에서 다양한 사회의 사람들과 만날 때 얼마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인가?
민족의 특성과 우수성을 내세우는 정치는 20세기의 낡은 정치적 패러다임에 불과하다. 이웃에게 끼친 상처의 아픔을 외면하고 역사를 미화해서 다른 사회를 차별화하도록 교육받은 미래 일본의 젊은이들이 세계에서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이제 민족이라는 20세기의 이데올로기는 벗어 버려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세계시민이 되도록 더불어 사는 지혜와 인류의 공동선을 가르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이다.
민족이나 종교가 다른 사회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할 때 갈등과 오해는 증폭된다.
나치와 일본의 군국주의가 세계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는가. 또 21세기의 시작이 미국과 이슬람의 갈등에 의해 테러와 보복전쟁으로 얼룩지고 있는 것을 잘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일본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적인 힘을 강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힘의 논리는 또 다른 힘의 반작용을 초래한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보다 높은 차원의 일본 미래를 건설하라는 것이다. 일부 우익 단체에 밀려 일본을 편협한 민족주의로 되돌리지 말고 더불어 사는 세계국가가 되기 위한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우려하는 것은 과거사나 민족주의적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을 미래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국제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교과서 문제를 대충 덮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양국의 미래와 젊은이들을 위해 잘못된 방향은 수정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젊은이들이 품어야 할 미래의 세계는 크고 넓기 때문이다.
/염재호 고려대 행정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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