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은 솜처럼 가볍습니다. 무리지어 피어있으면 화려하지만 하나 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연약하기 짝이 없죠.허연 수염 같은 억새의 꽃은 정확히 말하면 털이가득 붙은 억새의 열매입니다. 가녀린 열매와 털은 빛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햇살의 양과 방향에 따라 억새꽃의 모습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억새는 하루에세 번 모습을 바꾼다고 합니다.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은 은억새, 붉은 노을에 비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금억새, 달빛을 머금으면 솜억새가 됩니다. 그래서 억새를 보기 위해 산에 오를 때에는 시간을 잘 맞춰야 합니다.
은억새를 보려면 일출에 맞춰 정상에 닿아야 하고, 금억새는 일몰 이후에 산을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어둠 속의 산행이 됩니다.
어느 정도 산과 억새에 미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반인이 억새를 보려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만 피하면 됩니다. 적당히 기울어져 있는 태양을 마주하고 역광으로 봐야 반짝거리는 억새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금억새든 은억새든 억새의 모습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쓸쓸함입니다. 인생의 황혼에 선 노인의 백발처럼 억새는 가슴 속에 무엇인가를 치밀어오르게 합니다. 하얀 손을흔듭니다. ‘어서 오라’는 반가운 손짓이 아닙니다. 보내는 손짓입니다. 무엇이 가는 것이 아쉬워 저리도 끊임없이 손을 흔들까.
억새는 소리도 쓸쓸합니다. 바람에 흔들려 버석거리는 억새.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 중 가장 메마른 소리입니다. 소음이 전혀 없는 산꼭대기에서 오직 억새 소리만듣고 있노라면 그 메마름에 눈이 따가와져 눈물이 나올 정도입니다. 옛노래 ‘짝사랑’에서 그랬던 것 처럼 억새는 정말 슬피 웁니다.
그래서인지 억새여행은 깔깔거리는 신나는 나들이가 아닙니다. 쉬지 않고 올라가 반환점을 찍고 서둘러 내려오는 체력 과시용 산행도 아닙니다.
가을, 그 쓸쓸함의 정한에 다가가는 길입니다. 여유를 갖고 산에 올라 가능한 한 많은 시간 억새밭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가슴 한 구석을 바늘로 찌르는 듯 알싸한 회한이 느껴질 때까지 말입니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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