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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제정 100주년 기념 문학회의'에 다녀와서…소설가 황석영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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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제정 100주년 기념 문학회의'에 다녀와서…소설가 황석영 기고

입력
200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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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트롬소에서는지난 달 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마케도니아 등 세계 분쟁 지역의 작가들이 모였다.노르웨이 외교부와 노벨위원회, 노르웨이 작가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노벨상 제정 100주년 기념 문학회의’였다.

우리나라의 소설가 황석영(58)씨도 세계의 작가들과 어울려 정을 나누며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토론했다. 노벨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트롬소를 다녀온 황석영씨가 기고를 보내왔다.

서양인들의 휴머니즘을 비꼬는 농담 한 가지가 있다. 하필이면 아프리카 흑인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를 빗댄 이야기다.

그의 병원에 어느 부족의 추장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때마침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추장이 물었다.

당신네 땅은 전쟁 중이라던데 도대체 몇 사람이나 죽이는가. 한 100여 명 죽이는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그러면 1,000 사람쯤 죽이나. 아니 그 이상이다.

작은 부족의 추장은 1,000명 이상은 숫자의 개념이 없어서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마디 하였다. 백인들도 별 수가 없구먼. 그렇게 다 먹지도 못할 사람들을 죽여서 무얼 하나.

화약을 발명해서 전쟁의 참화를 극대화한 이가 인류의 삶이 보다 나아지는 데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역시 유럽 근대사답다.

이 상이 제정될 때에 유럽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경영하여 착취와 압제를 밖으로 돌리고 내부의 사회적 모순들을 달래가면서 지금처럼 민주적이고 복지적인 시민사회를 이루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북유럽 지역은 아직은 변두리여서 이러한 원죄에서는 약간 비켜나 있었다.

누구 말마따나 세계는 넓고 문제는 아직도 산더미처럼 많다. 아마도 노벨상은 지금 세계 앞에 놓인 반인류적 문제들을 함께 연대하여 풀어 나가자는 하나의 빌미와 약속 같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농담처럼 노벨상은 유럽인의 눈동자에 비친 세계관의 반영이며 그들에 의해서 부여되는 하나의 가치관이다.

분쟁지역 작가들 귀중한 만남

지난 달 초에 나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제정 100주년 기념 문학회의’에 다녀왔다. 초청된 작가들의 명단을 보면 스칸디나비아 사람들 몇몇을 빼고는 거의가 세계 분쟁지역에서 부른 사람들이었다.

주제는 ‘전쟁과 평화’ 였는데 참가한 작가들이 미처 20명도 못 되었지만 착실하고 알찬 행사였다.

친교의 시간을 이틀쯤 보내고 나서 사흘 동안에 오전 ㆍ오후로 나누어 문학회의 주제에 따른 자기 원고를 발표하고 토론과 질의 응답을 했으며 저녁에는 카페에서 작품 낭송회가 이어졌다.

노르웨이 외교부와 노벨위원회, 노르웨이 작가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장소는 북극 휴양지로 알려진 트롬소였다.

트롬소는 초청장에 나와 있는 대로 1년 중에 가장 좋은 날씨였다. 우리네 늦가을 정도의 기후에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간간이 끼어 있고 낮에는 더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저녁 어스름이 되면 밤 바람이 차가워졌다. 트롬소에 내리자마자 버스에 올라 우리가 친교의 시간을 보낼 소마뢰이로 향했다.

소마뢰이 마을의 산장 같은 소박한 숙소에서 짐을 풀고 저녁부터 서로 엇갈리면서 마시고 이야기하고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예프투셍코의 고백

먼저 예프투셍코 얘기를 해야겠다. 그는 우리들에게는 4ㆍ19 이후 60년대에 사상계 잡지의 특집으로 소개되었다. 이른바 비판적으로는 소련 수정주의 시대인 흐루시초프 때에 청년 시인으로 소개 되었다.

예프투셍코는 내 나이보다 꼭 10년 위이니 지금 69세인데 시인 고은과 동갑내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침없고 노인 같지 않은 모습이며 활달한 손짓이 고은과 닮아 보인다. 울긋불긋한 손으로 뜬 것 같은 두툼한 털 스웨터를 입고 마르고 훌쩍 큰 키에 목소리가 컸다.

나와 마주 앉더니 느닷없이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사과한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그가 말을 꺼냈다. 올림픽이 있던 한 해 전인가에 펜클럽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있었다. 예프투셍코는 그때 회담에 참가하지 않은 한국 문인들이 어떤 젊은 시인의 석방을 위해서 몇몇 외국 문인들을 접촉하려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게 김남주라는 시인이며 이제는 죽어 세상에 없다고 말해 주었다. 하여튼 그는 관리들과 그에게 붙여준 어느 노문학 교수들의 안내로 다른 자리로 안내되었고 봉투를 3개나 받았다.

그는 사람은 좋지만 그가 보기에 작품은 별로인 작가협회 회장이던 러시아 동료 소설가를 약간 원망했다. 그런 식으로 여러 외국 작가들이 다른 자리로 안내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봉투 안에는 5,000달러씩 세 개나 들어 있었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로 개방하기 시작한 소련 형편에는 팔자를 고칠 만한 돈이었다.

나는 당시에 미국 펜 회장이던 수잔 손탁과 일부 유럽 작가들과 함께 문인 석방안을 세계 펜대회에서 가결시키려고 했는데 이런 이유로 부결되었음을 눈치는 챘을지언정 이제서야 알게 된다.

예프투셍코는 말했다. 집에 돌아와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이 들어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아내는 이것이 당신의 첫째 가는 비밀이니 남들에게 절대로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코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그 일이 괴로웠다며 이제 다시 사과한다는 것이다. 나는 코가 시큰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지난 8월에 평양을 다녀오며 ‘평화촌’ 행사를 기획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트롬소에서의 행사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에게 오겠냐고 물으니 안타깝게도 새 학기에 미국 대학에서 강의가 시작 된단다.

그는 대뜸 종이에다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바라는 시였는데 나는 그만 그 종이쪽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이 고백이야말로 어느 성명서보다도 값진 것이다. 아무튼 언제 알맞은 때가 되면 그가 다시 와서 다른 모습으로 시를 낭송할 수 있겠구나.

브레히트의 동료 슈테판 하임

슈테판 하임은 우리들이 그의 연설을 듣고 “고참이 다르다”고 감탄을 했듯이 근사한 노인이었다. 나보다 30년 위이니 우리 나이로 89세의 노인인데 아직도 눈이 빛나고 목소리도 힘이 있다. 그는 브레히트와 더불어 반파쇼 투쟁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다가 매카시 바람이 일던 시절에 유럽으로 돌아와 동베를린에 정착했다.

물론 그는 서구 제국주의의 추악한 얼굴을 질타함과 동시에 ‘신나는 사회주의’의 시선으로 관료화하고 경화한 동구 사회를 비판했다. 슈테판 하임은 자료에 나온 내 단편 ‘삼포가는 길’을 읽었다며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강렬한 캐릭터와 구성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누구에게서 배웠느냐고. 나는 겸손하지만 자신있게 말했다. 거의 절반은 내 삶의 경험이라고.

이자트 가자위는 겉 모습은 나보다 10년쯤 위로 보이지만 실상은 나보다 10년 아래인 팔레스타인 작가다. 쉰도 안 되어 머리가 하얗게 세고 콧수염까지 기르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다.

처음에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에서 접시를 들고 뷔페식 음식 주변을 맴돌다가 부딪쳐 인사를 하게 되었다. 첫 마디는 그저 굿모닝이었는데 그가 서바이벌이란 말을 꺼냈다.

생존, 생존, 그저 온 내 인생이 생존을 위해서요. 어디서 왔냐니까, 팔레스타인이라고 대꾸한다. 내가 남한에서 왔다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내 친구”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그에게 내가 부르면 한국에 오겠느냐고 했더니 진지하게 꼭 가겠다고 하면서 덧붙였다. “내가 만약 앞으로 두 달 동안 살아 남으면.”

아모스 오즈와 보고밀 쥬젤

그에 비해서는 훨씬 세련되고 부드럽고 눈빛이 따뜻한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 작가다. 그의 소설 두 권이 이미 한국에 번역되었다.

그는 작가이면서 이스라엘의 평화운동가이기도 하여 팔레스타인 작가들과도 친밀한 동료 사이이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원리주의 근본주의를 둘 다 혐오한다.

그는 유머러스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슨 비약 같은 걸 만들어서 모두에게 먹이고 싶다는데 그러면 자신도 근본주의에 빠지게 될 거라고 웃는다.

보고밀 쥬젤은 마케도니아에서 온 시인이다. 오즈와 동갑이며 65세다. 그는 출국하기 위해 세 곳에서 비자를 발급받았다고 말했다.

마케도니아를 나토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구권 변화 이래로 오랜 내전에 시달렸다. 아내와 딸을 외국에 내보낼 생각이라고도 말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했더니 자기는 다 늙었고 마케도니아 말로 시를 써야 하니까 그 땅에서 죽겠단다.

앞으로 두 달 동안에 정치적 변화가 없다면 내게 오겠다고 그가 말했는데, 베를린에서 만난 한스 크리스토프 부흐는 마케도니아는 이제 안정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들 분쟁지역에서 온 친구들이 모여 앉았을 때는 웃고 이야기 하고 그랬지만 혼자 앉아 있을 때의 깊은 그늘을 떨어져 앉아 훔쳐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농담처럼 자신이 겪은 세계의 고통을 우스개 섞어 이야기했다. 나는 작년에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자신은 비관주의자라는 말에 “나는 비관적 낙관주의자”라고 했던 말과 그가 자기는 이상주의자라는 말에 “나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작가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코리아를, 베트남을, 인도네시아를, 멕시코를, 칠레를,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르완다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이야기했다.

한스가 르완다에 관한 자신의 새 소설을 쓰게 된 사랑 얘기를 한다. 그는 르완다의 인종 청소를 하던 살육 현장에 있었다.

바로 눈 앞에서 사람들의 목이 마구 잘려 나갔다. 아름다운 흑인 여성을 알게 되었는데 그네는 온 식구를 잃었다.

한스는 그네와 사랑에 빠졌다. 그네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나는 살아나면서 무수히 강간당했다고. 그래서 당신과 잘 수 없다고. 모든 섹스가 나에게는 폭력 그 자체이므로.

작가는 살아있는 인간 편이다

내가 코펜하겐을 거쳐서 일본 나리타 공항에 이르니 태풍이 지나가고 있어서 비행기는 연착이었다. 밤중에야 집에 돌아와 막 누웠는데 영화 같은 장면이 화면에 가득찼다. 비행기가 맨해튼의 무역센터 빌딩을 들이받아 폭발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우리 행사의 포스터 글씨가 떠올랐다. ‘전쟁’이라는 글자는 크게 그리고 그 밑에 아주 작게 ‘평화’라고 박혀 있었다.

이튿날 나에게 전화를 건 노르웨이 작가 할프단이 말했다. ‘테러’는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가난, 굶주림, 압박, 고통이라고.

황제의 마차에 던진 폭탄과 주변 아이들의 죽음에 관한 카뮈의 고전적인 논쟁이 떠오른다. 뉴욕 시민들의 죽음과 바그다드에서 뉴스에도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라크의 100여 만 민중을 생각한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놀란 소년의 눈을 생각한다. 20세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이행 중이다.

테러는 반대하지만 모든 국가주의를 빌미로 한 폭력 행위도 반대한다. 우리가 무사안일하게 보낸 1990년대의 10년 동안 미국의 정치ㆍ경제적 봉쇄 속에서 북한의 내 동포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와 병으로 200만 명 가까이 서서히 죽어간 사실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 작가들은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편이므로 어떠한 전쟁도 반대한다. 전쟁에 대한 어떤 기여나 도움이나 참여 역시 절대로 반대한다.

새로운 세기를 스스로 말하여 더러운 전쟁으로 시작하면서 밀레니엄 좋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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