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푸쉬킨은 이렇게 말했다. “몽골이 우리 러시아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알지브라(algebra; 대수학)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전해주지 않았다.”무려 삼백년 가까이 러시아를 지배했던 몽골인은 아무런 고급문화도 소유하지 않았던 야만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러시아 자존심의 선언이요, 동시에 “주검을 위해 울어줄 눈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처참의 극을 이룬 살육과 파괴만이 그들이 남긴 유산이라는 분노의 목소리인 것이다.
걸식승으로 전전하다가 홍건적의 두령이 되어 마침내 북벌군을 지휘하게 된 주원장(朱元璋)은 “호로(胡虜)를 몰아내고 중화(中華)를 회복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몽골인에 대한 한족의 반감을 최대로 이용했으니,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들어선 뒤 몽골지배가 어떤 평가를 받았을 지는 추측할 것도 없이 자명해진다.
몽골인들에게 한족과의 혼인을 금지시키고 한족의 의상을 입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문명과 야만은 결코 섞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오늘날 몽골을 방문하여 며칠을 지내본 사람이라면 아마 푸쉬킨이나 주원장의 입장에 쉽게 동의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려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초원에 가끔씩 눈에 띄는 천막과 가축뿐, 어쩌다 도시라는 것을 만나도 낡은 광산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판잣집들이 웅기중기 모여있는 정도이다.
북경이나 이스탄불, 카이로나 사마르칸드가 자랑하는 거대한 궁전도 사원도 찾아볼수 없다.
지금부터 800년 전, 문명의 입김조차 제대로 쐬지 못했던거친 유목민들이 과연 인류문명의 발전에,혹은 세계사의 진보에 무슨 기여를 했겠는가.
그러나 문명만이 문명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농경민들이 갖는 허구적 편견에 불과하다.
이미 모로코 출신의 아랍인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un: 1342-1406)이 설파했듯이, 문명은 도시에서 탄생하고, 도시는 왕국과 왕권이 있을 때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왕권은 권력의 장악을 가능케 하는 ‘연대의식’(이븐 할둔은 이를 아랍어로 ‘아싸비야 asabiyah’라고 불렀다)을 소유한 집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바로 이 ‘연대의식’은 도시민이 아니라 초원과 황야에 거주하는 부족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농경지와 초원이 혼재하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를 대상으로한 그의 결론을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우나 ‘문명’의 새로운 피가 ‘야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결코 희귀한 예가 아니다.
13세기 전반 온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몽골제국의 정복이 단지 파괴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속속 밝혀지고 있고, 여러 학자들이 새삼 이븐 할둔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현재 중국의 수도 북경을 최초로 도읍으로 삼은 것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였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곳에 거대한 계획도시를 건설하여 오늘날북경의 모태를 이룩한 것은 바로 몽골인이었다.
서아시아를 정복하고 나서 이란 서북부타브리즈(Tabriz)라는 곳에 도읍을 정한 몽골인들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정확한 천체관측을 할 수 있는 천문대를 건설했고, 러시아를 지배했던 그 동족은 볼가강하류에 신도시를 세워 사통팔달의 교역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전통은 몽골제국의 후예들에게도 계속되었다. 정복자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도시사마르칸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사원과 학교를 건설했고,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아프간의 도시 헤라트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처럼 혼란과 전화를 피해모인 수많은 학자 시인 화가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이처럼몽골인들은 각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교통망을 정비했다. 곳곳에 두어진 역참과 대상관(隊商館)은 교역을 촉진시켰고, 상인들의 국제무역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화폐단위도 통일시켰다.
기마민족이었지만 해양진출에도 개방적이어서 중국해에서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드넓은 바다는 원양을 오고 가는 선박으로 북적였다.
17세기에 들어와 러시아가 시베리아로진출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인도양으로 나오기 전까지,몽골제국의 시대만큼 수많은 사람과 상품이 동서를 오간 예는 없었던 것이다.
학자들이 이 시대를 일컬어 ‘몽골인의 평화(Pax Mongolica)’라고 부르는 것도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문화적 포용성 때문이었다. 성공한 제국들이 다 그러하듯이 몽골 역시 제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과 문화, 언어와 종교를 포용했고, 그런 이질적 요소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불교의 승려와 도교의 수도자, 기독교의 사제와 이슬람의 종무자들에게 동일한 혜택을 부여해 주고, 모두 국가와 군주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유했다.
서로가 최고의 종교라고 주장하자 대칸은 그 대표들을 불러모아 자기가 보는 앞에서 토론을 벌여 자웅을 겨루어 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토론이 끝난 뒤 어느 종파의 손을 들어주어 다른 종교를 박해하지는 않았다.
뿐만아니라 서구의 교황과 국왕들이 보낸 사신이 몽골과 중국을 다녀가고 수많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아시아 각지에 근거지를 만들었다.
또한 원나라 황제가 보낸 대신이 서아시아에서 최고 정치자문이 되어 개혁을 주도하는가 하면,내몽골 출생의 기독교도가 바그다드에 본부를 둔 동방기독교파의 총주교가 되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가 가능했던 것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제국이 가져온 이러한 미증유의 문화적 교류와 공존은 당시의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역사상 최초의 세계사라고 일컬어지는 집사(集史)의 출현이다.
당시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일 칸국의군주는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도 세계 전역의 인류에 대한 정황을 기록한 역사서는 집필되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각종 종교와 민족에 속한 현자와 점성가와 학자와 역사가들이 어전에 모여있다”고 말하면서 재상 라시드 웃 딘(Rashid al-Din: 1247-1318)에게 세계사의 집필을 권유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제1부 ‘몽골사’ 제2부 ‘세계민족사’ 제3부 ‘세계지리지’ 등 모두 3부로 이루어진 집사가 완성되었다.
제3부는 망실되어 버렸으나 1, 2부는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특히 제2부에는 아랍 이란 중국 투르크 인도 프랑크 유대 등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와 설화가 종합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렇게볼 때 몽골이라는 세계제국의 출현은 정치ㆍ경제적 통합과 교류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루었고, 과거 문화적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지역의 역사를 뛰어넘어 세계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는 관점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의 시대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세계사의 탄생’이었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위구르족 수도 카라발가순
끝없는 초원이펼쳐진 몽골에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들어서기 전부터 많은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위구르족도 그들 중 하나.
카라발가순은 위구르족이 돌궐족, 만주족, 몽골족 등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이룬 8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위구르족은 이곳에 동서약 510m, 남북 약 400m의 궁전을 두었고 마니교 사원과 관개용수로도 설치하는 등 제국 수도로서의 위용을 갖췄다.
하지만 지금볼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이중의 토성과 성 가운데의 망루뿐이다. 기껏해야 5m미터 정도 높이인 토성은 경사마저 완만해 누구나 쉽게 넘을 수 있을정도.
다행히 초원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가운데에는 20m 정도의 망루가 솟아있는데 거의 허물어지지 않은 것이 도읍지전체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성 바깥으로는경작지 흔적도 있다. 김호동교수는 위구르족이 유목민이면서도 농경 문명을 많이 수용해 농사를 지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카라발가순 부근의 토지는 지금도 비옥하기로 유명하지만 아무도살 지 않는 황무지로 버려져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가가 여기서 차로 한 시간을 달려야 닿는 몽골대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이다.
카라코룸에서도 만나는 것은 16세기쯤의 유적인 에르덴조 사원. 몽골제국의 흔적은 돌거북 하나 뿐이다. 카라코룸이나 카라발가순에서 생각케 하는 것은 역시 대제국의 허망함일지도 모른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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