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9일 영수회담은 대화는 짧았지만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좋았다.의제 자체가 여야의 합심을 전제로 한 난국극복이었기 때문에 논쟁이나 이견이 끼어 들 틈새가 없었다. 9개월 만의 대좌인데다 정치 복원을 바라는국민 여론이 강해 갈등을 촉발할 언행이 오갈 수 없는 분위기였다.
청와대는 “반(反) 테러 전쟁에 대한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여야간 신뢰회복의 초석이 됐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오홍근(吳弘根)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회담은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여야가 협조해 나가기로 합의한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유선호(柳宣浩) 정무수석은 “신뢰를 심는 출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면서 “회담 추진 과정도 밀고 당기는 것 없이 신속하고 산뜻했다”고 말했다.
그는 “여소야대가 되면 정국이 불안할 것 같지만 오히려 타협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기대를 표시했고,다른 고위 관계자는 “여야 영수가 초당적 대처를 합의함으로써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국제사회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도 “이전의 회담과는 달리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고 평가했다. 권철현(權哲賢)대변인은 “대통령과 이 총재가 서로 부인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예전에는 회담장을 나오면서 바로 헤어졌는데 오늘은 엘리베이터타는 데까지 배웅했다” 는 등의 상황을 전하며 “회담이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고, 잘 끝났다”고 말했다.
회담은오전 10시40분에 시작, 11시35분에 끝나 55분간 진행됐지만 포토 세션과 인사, 진념(陳稔) 경제부 총리와 김동신(金東信) 국방부 장관, 최성홍(崔成泓) 외교부 차관의 보고를 빼면 실제 대화는 25분 정도로 짧게 이루어졌다.
김 대통령은 회담장인 2층 백악실 앞에서 이 총재를 맞았고 회담 후 이 총재가 떠날 때에도 2층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가 전송했다. 회담에 앞서 두 사람은 미국공격의 성격, 가을비, 주가 등을 화제로 담소했다.
두 사람은“오랜 만에 뵙는다”는 인사를 나눈 뒤 “비가 와서 다행이다” “해갈에도움될 것 같다”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김 대통령은 “어제(8일) 이 총재가 국회 대표연설에서 정부의 테러정책을 격려하는 등 협력을 해줘 주가가 올랐다”고 감사를 표하자, 이 총재는 웃으며 “국민 불안을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화답했다.
김 대통령은 “이번 전쟁은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하는 불확실한 전쟁”이라며“이런 때일수록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알리고 협력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총재는 “이번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 총재는 회담 시간에 맞추느라 민주당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의 대표연설을 전혀 듣지 못했다. 이 총재는연설 시작 후 청와대로 출발하려 했지만 본회의가 늦게 개회하는 바람에 연설 직전인 10시6분 본회의장을 나왔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달랑 발표문 한장?
여야 영수회담이 끝난 후 청와대 오홍근(吳弘根) 대변인은 5개항의 공동발표문을 배포하면서 “발표문만 얘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에서도 권철현(權哲賢) 대변인이“발표문 외에 더 얘기할 게 없다”고 말했다.
통상 영수회담 후에는 양측 대변인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로부터 대화 내용을 구술 받아 발표했기 때문에 대화록 없는 브리핑은 아주 이례적이다.
발표문만 있는 회담 브리핑은여러 해석을 낳았다. 일각에서는 “공동발표문이 사전에 실무 협상에서 마련됐기 때문에 정치문제 등 다른 얘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제기했다.
난국을 맞아 여야가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발표문만 내놓고 정치적 현안에 대한 대화는 발표에서 제외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9개월만의 대좌, 대립구도의 여야관계, 김 대통령과 이 총재간의 감정적 거리감 등을 감안하면 발표문 이외의 깊은 얘기가 오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 견해이다.
시간상으로도 55분의 회담 중 사진촬영과 인사 5분, 관련 부처 보고 25분을 빼면 실제 대화는 25분 정도에 그쳐 다른 주제가 논의되기는 어려웠다.추가로 브리핑할 내용이 별로 없었다고 봐야한다.
이는 갈등과 대립의 정치 현실을입증해준다. 청와대가 영수회담을 제의하면서 오찬을 곁들이자고 했지만, 이 총재가 이를 사양했다는 뒷 얘기도 골 깊은 우리 정치의 어두운 소묘(素描)를 보여준다.
다만 만났다는 사실 자체,그리고 난국 앞에서 여야가 대승적인 협력의 모습을 국민에 보여주었다는 점은 미약하나마 정치복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회담후정국 전망에 대해 “두고 보자”는 말 만을 하고 있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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