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은 행복한 단체다. 그들을 열렬히 지원하는 팬클럽이 있기 때문이다.국립발레단 동호회 ‘정 익는 발레마을’(이하 발레마을)이다.국립발레단의 인터넷 홈페이지(www.kballet.org) 안에 둥지를 튼 웹 모임이다. 국립발레단 홈페이지 개설 다음 날인 올해 1월 1일부터활동에 들어가 지금은 회원이 무려 1,300명에 이른다.
그저 발레가 좋아서 모인 보통 사람들이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직장인들의 활동이가장 활발하다. 대학생이 많고 초등학생, 주부, 40대 회사원까지 분포가 다양하다.
발레마을 주민들은 국립발레단의 열혈지기를 자처한다. 공연을 빠짐없이 보는 것은기본. 단체 관람티켓을 끊어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발레마을 게시판에는 끝없이 글이 올라온다. 공연평이나 감상기, 발레에 대한 질문과 답,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 외에 발레단 식구들이나 발레마을 주민들을 생일을 챙겨 축하하는 정겨운 풍경도 벌어진다.
‘백조의호수’, ‘스파르타쿠스’ 공연 때는 격려의꽃다발로 국립발레단 군무 무용수들을 감격시켰다. ‘정 익는’ 이란 수식어에 걸맞게 정이 새록새록 솟는 모임이다.
오프라인 활동도 활발하다. 작품 감상회를 열어 영상물로 발레를 공부하는가 하면,공연이 임박하면 여러 형태로 자원봉사에 나선다.
관객 늘리기 작전을 펼쳐 공연 소식을 인터넷 여러 사이트에 올리거나 대학교, 사람들이 자주 찾는레스토랑이나 카페, 아파트 단지에 홍보 전단을 뿌리기도 한다.
자원봉사자들은 공연장 로비, 발레단 사무실, 무대 뒤에서 땀을 흘린다. 티셔츠ㆍ엽서등 발레단 기념품을 팔고, 무대 뒤에서 무용수들의 의상과 소품을 챙겨주고, 사무실에서 공연 문의 전화를 받거나 우편물을 발송하는 등 일손을 돕는다.
내부 소모임도 많다. 남자 모임인 DPS(Dead Poet Societyㆍ죽은시인의 사회)를 비롯해 미시 나라, 어린이 나라, 여대생 나라, 군인 나라 등이 있다.
DPS 모임은 영화에서처럼 시를 돌아가며 낭송하는데,25일 저녁에는 가을 특별 행사로 브람스 음악 감상회를 가졌다.
발레마을에는 이처럼 발레뿐 아니라 음악, 미술, 연극, 오페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많아 서로 정보를 주고 받고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한다.
국립발레단은 동호회의 정성에 보답하는 행사로 19일 그들을 위한 공개클래스(발레기본 동작 연습)를 열었다.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진행된 클래스 참가자는 40명. 대부분 발레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클래스가 진행되는 1시간 반 동안 여기저기서 끙끙거린다. 국립발레단 최선아 지도위원의지도에 따라 열심히 동작을 해 보지만, 영 어설픈 게 힘든 표정이 역력하다.
“새끼 발가락이 땅에 닿는 느낌으로 발끝을 곧게 펴세요.” “귀를 위로 잡아당기는 느낌으로 목을 쭉 빼고, 엉덩이,허벅지 꽉 조이고 배 집어 넣고, 다리 붙이고… ” 주문은 계속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내평생 이렇게 힘든 건 처음 해 본다”는 한 주부의 말에 최 위원이 말한다. “내일일어나기 힘들걸요. 몸살 날 텐데. 쉬었다 하세요.”
한 어린이가 옆으로 걷는 동작을 잘 해서 칭찬을 받자 바로 들리는 외침. “제딸이예요.” 그 말에 폭소가 터진다.
발레마을에는 초등학생 아이와함께 주민으로 등록한 엄마들이 꽤 있다. 청일점으로 낀 한 남자 회사원.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엉거주춤 열심히 따라 하던 그는 클래스를마치고 말했다. “고문이었어요. 허리가 다 저릿저릿하네요.”
이날저녁 예술의전당 건너 음식점에서 발레마을의 정기모임이 열렸다. 참석자는 40여 명. 인터넷 게시판에서 만나던 주민들이 매달 한 번 직접 만나 얼굴을익히는 자리다.
게시판과 오프라인 활동에서 두드러진 회원 가운데 이 달의 열혈지기상, 나도평론가상을 뽑는다. 9월의 나도 평론가상은 ‘파파스머프’ 아이디를 쓰는 중년 남성 회원에게 돌아갔다.
국립발레단의 최근작 ‘스파르타쿠스’의 의상 색채를 세밀하게 분석한 글을 게시판에 올려회원들을 감탄시킨 주인공이다.
'백조의 호수' 연습이 한창이던 6월의 열혈지기는 단원들 먹으라고 집에서 직접 만든 딸기잼을들고 연습실로 찾아간 주부였다.
무용수 집중 인터뷰가 이뤄지는 것도 정기모임에서다. 이날은 국립발레단의 스타이원국이 초청됐다.
헐렁한 셔츠와 파자마 같은 바지에 맨발로 나타난 그에게 발레 이야기부터 개인적인 호기심까지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고, 그는 가끔썰렁한 답변으로 좌중을 웃겼다. 발레마을 주민들은 이런 행사를 통해 발레와 무용수를 좀 더 잘 알게 된다.
인터뷰가 끝나자 회원들의 자기 소개가 이어졌다. 예쁜 여자가 좋아서 발레를 좋아하게됐다는 사람, 발레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사람, 입장권을 못 구하자 개구멍을 찾아 공연장 3층 화장실로 침투한 무용담의 주인공, 국립발레단공연을 보려고 외국 연수 출국 날짜를 늦춘 사람 등 저마다 발레에 얽힌 인연을 말하며 열성 회원이 되자고 서로 다짐했다.
발레마을의 운영진 대표인 마을지기 임영숙(26ㆍ숙명여대 대학원생)씨는 “동호회활동을 하면서 공연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우게 됐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것은 관객이 수동적인 구경꾼에 그치지 않고 공연을 함께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모습을 발레마을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은공연 시작 전부터 끝난 뒤까지, 홍보, 공연 감상, 평가, 격려까지 자청하고 있다. 이처럼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팬클럽을 가진 국내 예술단은 국립발레단이유일하다. 국립발레단은 좋겠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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