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귀는 거칠어요. 우리는 확실하게 ‘아니요’라고 말해야만 알아들어요. 그러나 동양인의 귀는 섬세해서‘예’라고 말해도 그 안에 담겨있는 ‘아니요’를 알아내지요. 동양인의 ‘예’는때때로 ‘아니요’라는 다른 옷을 입고 있더군요. 공손한 부정 말입니다.”독일 최고의 문장가 중 하나인 크리스토프 하인이 언젠가 동양인인 내게 했던말이다. 그와 대화하다 보면 그가 평범한 대화자가 아니라 비범한 논객이라는 것을 안다.
그의 말 속엔 그 어떤 날렵하고 경쾌한 리듬이 있다. 더구나그는 마치 비밀스런 향신료를 쓰는 요리사처럼 자신이 직접 정제해 방금 저울에 달아 확인한 듯한 함량이 정확한 기막힌 형용사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의 사고의 타작마당을 거쳐 나온 말들은 끔찍하도록 정예하다. 거기에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계산된 습기, 철학자 하이데거의 언어들이 보증하는 결벽함까지만져진다.
그의 언어는 소독돼 있어 위생적이고 수학적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 폴커브라운과 함께 독일문단 최고의 ‘논증의 장인’으로 불리운다.
브라운이 특유의겸손한 느린 속도로, 초인적인 끈질김으로 자신의 테마를 검증해 간다면 하인은 쇄빙기로 단번에 얼음을 잘라내듯 번개처럼 빠른 말투로 자신의 테마를순식간에 재단해낸다.
하인은 자신을 스스로 ‘동양적 소설가’라고말한다. 이것은 그가 1997년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두 달 간 독일현대문학을 강의하면서 스스로확인한 것이다.
그의 스승 마이어가 생전에 베이징대학 명예교수였고 하인이 마이어의 애제자인 것을 생각하면 그의 베이징대학 강의 경력은 생경한 일이아니다.
브레히트, 마이어 그리고 다시 하인이 그렇게 중국, 즉 동양에 대한 사랑을 상속해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즐겁다.
브레히트가 중국 풍의희곡 ‘사천의 선인’을 썼듯이 하인도 1983년 베를린 독일극장에서 초연된 희곡 ‘아큐정전’을썼다.
하인이 아니더라도 구동독 예술가들을 만나면 대개 중국, 쿠바, 베트남에 대한 경험과 애정을 자주 얘기한다.
논쟁의 장인 하인이 무려 10년 동안 다듬어 1989년 소위 대전환기 직전에발표한 희곡 ‘원탁의 기사’가 있다.
이 희곡은 오랜 세월 젊음을 바쳐 성배를 찾아 나섰던 원탁의 제국의 아르투스 왕과그의 늙은 기사들이 탄식으로 적은 ‘성배의 정체(正體)’에대한 비장한 보고서이다.
물론 이 원탁의 제국은 구동독 호네커 왕조의 다른 이름이다. 성배 찾기에 지쳐 귀향한 늙은기사 란스롯의 최후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는 말한다.
“원탁의 기사들이란 백성들에게 결국 바보, 백치, 범죄자들의집단에 불과해.” 기사 카이에의 진단은 더 끔찍하다.
“우리는 누구도 원치 않는미래를 위해 우리의 인생을 희생했어.” 하인의 결론에 따르면 구동독권력자들은 결국 40년 동안 국민을 상대로 통치가 아니라 범죄를 해 왔다는 것이다.
동독 건국의 해인 1949년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그의 저서 ‘희망의원리’를통해 동독 정신사 속에 파종한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은 그로부터 꼭 40년 후인 1989년 소설가 하인에의해 수술대 위에 올라 그 정체가 부검되고 있는 셈이다.
동독 정신사 속에서 ‘보다 나은 삶’에대한 갈망은 시대에 따라 참으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자유의제국’으로, 블로흐는 ‘유토피아’로, 시인 베혀는 ‘말씀’으로, 하인은 그것을 ‘성배’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 제국-유토피아-말씀-성배로이어지는 이 질긴 희망의 행진, 그것이 동독 40년을 관통하며 그래도 동독의 존재를 연명시켜 준 힘이었다.
블로흐는 유토피아란 “아직의식되지 않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무엇”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40년 후 하인은 유토피아란 “영원히도래하지 않는 바로 그날”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빠르게 부언한다. “우리는 누구나 생애 중한 번은 틀림없이 행복했었다.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행복한 그 한 순간이 존재했었다는 그 사실,그것이 성배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증명해준다.”
유토피아를 성배라고 말한 하인의 용어가 그가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력을 폭로해주고있다. 1944년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등학교 입학이 거절되자 남동생과 함께 서베를린으로 도주, 그곳의한 인문고등학교 기숙사 학생이 된다.
잠시 귀향했던 1961년 여름 갑자기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자 그는 다시 운명적으로 동독 시민이 된다.
서베를린으로의 이 도주경력은 동독에서의 그의 삶 내내 재앙이 되었다. “다행히 미성년이어서 감옥에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당이 내린 크고 작은 벌을 감내해야만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과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전공한다. 한스 마이어의 수제자로 유명하지만 사실상 그는 마이어 신화의 영지인 라이프치히 대학 40호 강의실을경험하지 못했다. 그는 통신교육을 통해 마이너의 제자가 된 특별한 경우다.
구동독 시절 소설 ‘용의 피’ ‘호른의 죽음’ ‘탱고연주자’ 등 탁월한 작품들을 발표했던 그는 통일 후에도 소설 ‘나폴레옹게임’ ‘빌렌블록’으로 그의 견고한 사색을 과시했다.
소설 ‘빌렌블록’은개인의 자유, 사유재산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속에서 중고자동차 매매상으로 성공한 한 구동독 시민 빌렌블록이 왜 결국“한 자루의 권총이 국가보다 자신의 행복을 더 잘 지켜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를 정교한 문체로 논증해내고 있다.
“내가 구동독 정보국의 경악이나동독의 비참과 모순에 대해 쓸 때 서독 비평가들은 내게 찬사를 퍼부었죠.
그러나 통일 후 소설 ‘나폴레옹게임’처럼서독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그들은 정색을 하고 화를 내며 혹독한 평을 해댔지요.”
그의 작품들은 이미 40여 개 국에서 번역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두 달 전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내겐 요즘 전쟁에 대한근심이 있습니다. 50년 전 독일은 패전했고 전범국으로 톡톡한 벌을 받았습니다.
1945년 동독엔 “무기를다시 잡는 그 손, 말라 버리리라”는 전쟁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있었습니다.
전쟁이란 생각하는 것만도 절대금기였습니다. 그러나 50년 후 통일로 거대해진 독일은 이제 다시 사내가 되려 합니다.
손에 다시 무기를 잡고 코소보로, 마케도니아로 출정합니다. 다시 사내가 되려 한다는 것, 그것은 독일 역사가 다시금 피와 전쟁에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베를린의 한 라디오방송국에서 구성작가로 일하고 있는 아내 크리스티안네하인과의 사이에 장성한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미국 보스톤에서 수학자로 일하고 있는 장남 덕분에 그는 지난 6월 할아버지가 되었다. 매일 아침빈 종이 앞에 앉아야 하는 공포보다 더한 공포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은 유독 힘들게 글을 쓰는 작가라고도 고백한다. 소설 한 편의 집필 기간이평균 3년 정도가 되는 중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는 요즘도 직접 쓴 원고를 20년 된 구동독제 에리카 수동타자기로 정서해낸다. 노언론인 구스타프유스트의 말대로 그는 의심하는 자, 질문하는 자로서 그렇게 통일 독일문학의 최전선에 서 있다.
/재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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