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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 땅의 남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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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 땅의 남편들에게

입력
2001.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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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테러참사니, 이용호 로비사건이니 국내외가 뒤숭숭하지만 돌아올 명절은 어김없이 돌아오는군요. 그럼 이 땅의 아내들 이야기나 좀 들어봅시다.“명절이 돌아오면 시금치가 싫어져요.시집의 ‘시’자가 들어간 단어만 들어도 끔찍해요.고스톱만 치는 남편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어요. 힘들어 죽겠는데 나몰라라하는 게 너무나 야속해요. 그리고 왜 시어머니, 시누이 편만 드나요? 참으라고만 하면 대수인가요? 또 맏며느리가 죄랍니까? 왜 제사는 장남만 치러야 하나요? 이건 명절이 아니라 숫제 노동절이야. 명절이 아니고 아예 암절(暗節)이야. 화기애애, 조상숭배 좋아하네. 부엌에서 등 돌리고 눈물 훔치는 사람은 억장이 무너지는데. 죽은 사람한테 절하면 뭐하나요? 살아있는 사람한테나 잘 하지. 어디 집에만 가 봐라.”

“왜 여자들은 제사상만 차리고 절도 못하나요? 부정 탄다고요? 시집오면 그 집 귀신이라면서요? 명절만 되면 여자로 태어난 게 너무나 억울해요. 남자들은 남는 시간 죽이느라 지치고, 아이들은 심심해서 지치는데, 여자들은 허리가 휘어지게 일에 지치면서도 인정도 못 받고. 시어머니는 자기 딸도 며느리가 된다는 생각은 왜안 하죠? 자기 딸도 시댁에서 나하고 똑같이 고생한다는 걸 왜 모르죠? 친정에 전화 한 번 하려면 눈치 살펴야 하고. 명절만 되면 친정 엄마 생각이너무 간절해요. 서러워 못 살겠어요. 나도 시어머니가 되면 그럴까요?”

“이 땅의 남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왜 고스톱과 술판뿐인가요? 그리고 그 알량한 자존심, 허장성세, 마초 근성은 또 어떤가요. 집에서는 ‘여보 피곤하지’ 하면서 어깨도 주물러 주고 설거지도 해 주다가 자기 식구들만 모이면 왜 그리 어깨에 힘을 주고 핀잔만 주는지. 평소 사랑하는 척 자상한 척 하는 것, 시댁에 갈 때마다 다 감언이설이었다는 걸깨닫게 돼요. 자기는 손이 없나요? 발이 없나요? 스스로 물 한 그릇 떠다 먹으면 남자 권위에 금이 가나요? 집에선 잘 도와주는 아이들도 할아버지집에만가면 눈치 보면서 가만히 있게 돼요.”

“뭐, 자기 어머니는 1년 365일을그렇게 살았다고요? 그게 보기 좋던가요? 상 물리고 나서 구석에 엉덩이 붙이고 찬밥, 남은 반찬이나 먹던 어머니 모습이 그리 장했나요? 도대체지금이 21세기라는데 명절 모습은 19세기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아이들한테 이런 어머니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남기고 싶지도 않아요. 학교에서 아무리 남녀평등 교육, 성차별을 외쳐야 뭐해요? 아이들이 뭘 배우겠냐고요?”

“신문도 안 보나요? 명절증후군이란 말은 몰라도 좋아요. 남녀평등 명절운동이니, 함께 웃는 하하명절 보내기 운동이니, 대안명절 보내기니… 명절 때만 되면 그런 기사들로 도배를 하던데.며칠 전에는 ‘21세기명절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라는 거창한 세미나도 열렸더라고요. 얼마나 문제가 많으면 그런 토론회까지 벌어지겠어요? 뭐 여성민우회인가하는 곳에서는 ‘우리 집의 남녀평등 명절지수’ 같은 것도 매년 발표하던데…함께 그거나 풀어 볼래요? 내년에는우리 집 명절 사례가 한국일보에 소개됐으면 정말 한이 없겠어요.”

한기봉 문화과학부장

kib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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