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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실, 혹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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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실, 혹은 진실

입력
2001.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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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기관총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병사를 잡은 로버트카파의 사진은 그대로 전설이 됐다. 그는 이후 2차 세계대전, 알제리 독립전장터 등을 뛰어다니며 국가와 집단의 광기 속에서 스러져가는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그 뿐이랴. 골조만 남은 대동강 철교를 필사적으로 타넘는 남부여대의 한국전 피난민행렬, 네이팜탄의 화염에 쫓겨 울부짖는 나신의 베트남 소녀, 공포와 절망의 음영이 드리워진 병사들의 표정…. 이런 표현이 용서된다면 이들 사진에는 처절한 리얼리티와 함께 인간의 본래적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낭만적 시각까지 담겨있다.

하지만 10년전 걸프전 때 CNN이라는 경이적인 매체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크루즈미사일이 수백km를 날아 정확히 목표물에서 작열하는 모습, 바그다드의 밤하늘을 온통 물들이던 대공포화, 새벽 페르시아만의 미 항공모함 갑판위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전폭기들…. 전 세계 시청자들은 마치 스포츠 중계를 보듯 이것들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꼭 일주일전 비극적인 대미(對美)테러 사건에서 꼭 같은 상황이 재연됐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CNN의 성공에 자극받은 폭스 등 다른 TV들까지 경쟁적으로‘실황중계’에 뛰어든 것. 덕분에 여객기가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의 허리에 꽂히는 모습을 포함, 화면은 훨씬 더 생생하고 극적이었다.

사람들은 차마 믿을수 없는 잔혹한 장면에 말을 잊고, 생각을 잊었다. 반응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모든 것이 결정지어졌다. 분노가 미국을 덮치고 세계를 휩쓸었다. 현장중계가 채 끝나기도 전 세계인의 운명을 바꿔버릴 수 있는 전쟁결정이 내려졌다.

돌연 미국의 거리마다 성조기가 물결을 이루고“God bless America”의 기도가 넘쳐 흘렀으며, 복수를 다짐하는 젊은이들의 군 입대 지원행렬이 이어졌다. 찜찜한 시각이 있긴 했지만 함부로 드러낼 계제조차 아니었다. 무고한 숱한 생명들이 허망하게 죽어간 것은 눈뜨고 본 만큼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종종 진실과 같지 않거나, 심지어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사실은 단순히 있었던 그 자체지만, 진실은 그 의미와 이면, 혹은 역사적 배경까지도 성찰함으로써 발견되는 포괄적 개념이다.

사실은 찰나적이지만 진실은 통시적이다. 생중계는 한 장의 사진을 보기까지의 시간적 간극이 주는 사고의 여과과정도,또 전달된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성적 판단을 할 차분한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도 많은 이들은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워낙 엄청난 사실에 짓눌려 미처 진실을 숙고할 여유를 잃었다.

틀림없이 얼마 후 사람들은 첨단무기의 경이로운 성능과 영화같은 군사작전을 시시각각 TV로 지켜보며 또다시 일차적인 감정의 흐름에 자신들을 내맡기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차분히 생각해 보자.

CNN을 통해 보여지는현장. 그것은 사실인가, 혹은 진실인가.

이준희 기획취재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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