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종종 놀부를 본다. 큼직한 간판 위에서 놀부가 손님을 부르고 있다. 삼겹살이 지글거리는 놀부네 집, 거기서 권선징악의 도덕률은 뒤집혀 있다. 두꺼운 욕망의 비곗살을 뒤집는 사람들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전래의 이야기는 악덕과 심술로 살다간 놀부를 닮지 말라 했다. 흥부처럼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 가르쳤다. 그러나 놀부네 사람들은 젓가락을 놓으면서 이렇게 되묻고 있다. 놀부가 어때서? 여기가 당신의 집, 우리의 집 아냐? 이 되물음 혹은 반어 앞에서 전통적 규범과 현대의 도덕적 감수성 사이의 괴리를 실감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어떤 파탄의 상황으로 여기면서 분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분개가 사회적 통합을 해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그것이 무지의 소치이기 때문이다.
놀부네 가게가 들어 선 번화한 거리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조성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오로지 사적인 이익과 욕망에 따라 행위한다고 간주된다. 여기에서는 누구도 놀부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욕심의 화신 놀부가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형이어서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는 흥부 아니라 제비까지, 돈을 사용하는 주체는 일단 놀부 같은 사람으로 오해된다. 이러한 오해는 물신숭배의 부수 현상이다. 문제는 이 물신숭배가 개인의 도덕적 태도와 무관하게 일어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는 돈이 모든 가치교환의 공통된 척도이다. 척도라는 이 자격에 힘입어 황금은 초물리적 실체로서 물신화되어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게된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런 물신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 화폐사용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돈의 물신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착각이고, 이 착시현상 안에서 흥부와 놀부는 구분되지 않는다. 돈이 교환되는 거리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놀부이거나 물신숭배자의 위치에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원죄라 부를 만하다. 돈을 사용하는 한 누구나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죄인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윤리적 상황은 이 자본주의적 원죄로부터 출발한다. 옛날의 왕은 자신이 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왕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므로 당연히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추론했다.
이런 믿음은 놀부네 동네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거기서는 오히려 인간이 반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믿는다. 도덕적인 것은 생득적인 것도 아니고 선험적 근거를 갖는 것도 아니다. 흥부의 대박처럼 조물주가 보내줄 선물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덕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더불어 만들어 가야 할 어떤 것임을 말할 뿐이다. 사회적 질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법칙에 따라 설계되어 있는 어떤 고정된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질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조건들, 가령 인간은 반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일지 모른다는 전제들을 디디고 서서 끊임없이 조성해야 할 어떤 것, 힘겹게 고안하고 창조해야 할 과제이다. 사회적 통합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에 반하는 최악의 자연적 조건들을 수용하면서 성취해야 할 미래적 계획이거나 그 계획의 산물이다.
현대인은 반도덕적 조건에서 출발하여 도덕적인 것에 이르러야 한다는 역설적 과제 앞에 놓여있다. 그것은 놀부들이 모여서 흥부처럼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난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놀부는 자본주의적 원죄에 구속되어 있는 보통의 인간, 자연인에 대한 이름에 불과하다.
반면 흥부는 그 원죄로부터 벗어난 도덕적 인간, 과제로서의 인간을 지시할 것이다. 이 시대에 흥부는 도태될 인간이라기보다 부활해야할 인간이다. 그렇다면 테러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흥부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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