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회색 전쟁'의 시대가 시작됐다.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생한 이번 대규모 테러는 통상의 수준을 훨씬 넘어 테러 자체가 일종의 전쟁임을 말해주고 있다. 적은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이고 목적도 분명치 않으며 누가 가해자인지도 바로 파악하기 어렵다. 전선을 형성해 적진을 타격하는 기존의 전투 개념으로는 대응조차 쉽지 않다. 종전이란 없고 오로지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 국방부 장관은 12일 이번 테러에 대해 "새로운 전장을 정의한 것"이라고 언급,미국을 비록한 세게가 핵미사일 전쟁에 앞서 '테러전'에 먼저 대비해야 함을 시사했다.
■무자비한 대규모 테러전
이 같은 새로운 유형의 전쟁은 미국방부가 지난해 내놓은 '테러2000'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세계는 이제 '슈퍼 테러리즘'시대로 접어들었다"고 규정한 이 보고서는 정치 사회적 목표를 위한 요인이나 비행기 납치,특정 인물 살해 등과는 달리 선명치 않은 목적으로 대량 살상을 위해 가능한 무기와 수단을 모두 동원하는 것을 테러전의 특징으로 꼽았다.
이 같은 테러 유형의 변화는 냉전이 끝나고 이데올로기가 퇴조하는 1990년대부터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분석한다.좌파 이념과 제3세게 민족해방을 앞세운 이른바 '지사형 테러리즘'의 시대는 가고,이때부터 종교 광신이나 맹목적인 증오와 파괴가 결합한 제2세대 테러리즘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미국 등 서구의 전복을 내세우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 등이 대표적이다. 수위도 갈수록 증폭에 군사실 및 정부기관에 대한 폭탄테러에서 이제는 여객기를 이용한 무차별 민간 건물 공격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효과적 대응 불가능
대규모 인명 살상을 노리고 다양한 장소와 방법을 이용해 점 조직으로 공격하는 이 같은 테러전에는 대응이 어렵다.상시 보안으로도 소수의 공격자들을 완벽하게 막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해자의 실체도 분명치 않아 정확하고 효과적인 보복이 힘들다. 정체를 확인했다 해도 군대를 동원해 은둔지를 타격하는 데는 늘 더 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우려된다.
설사 보복에 성공해도 목숨을 내놓고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 이번 테러처럼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추가테러를 감행할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 미 연방수사국의 대 테러예산은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 이후 그 해 7,850만 달러에서 지난해에 3억 달러로 4배 이상 증가했으며 오클라호마 연방청사폭파(1995년),케냐·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파(1998년)이후 미국은 건물이나 차량을 이용한 폭탄 테러에 대비한 보안에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하지만 랜드연구소의 테러전문가 브루스 호프만은 "기존의 폭탄 테러에 성공적으로 대비한 것이 결국 그보다 훨씬 강하고 파괴력 있는 다른 방식의 테러를 유도한 셈"이라며 테러전 대응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보복 방식도 논란
참사 이후 미 국내 강경파는 이번 사태가 전쟁행위로 규정된 이상 우선 ‘적’을 색출하고 적지의 주요 도시나 국가 시설물을 대규모로 폭격하는 전면전에 돌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부 장관 등은 이번 사건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빗대어 그때와 똑 같은 전쟁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핵무기 사용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오사마 빈 라덴의 조직이 범인으로 밝혀진다 해도 별도의 부대나 대형 무기 등 이른 바 ‘하드웨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타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지적부터 미국의 강공책이 수 십년간 보복의 상승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국제법상으로 유엔 헌장 51조에서 규정한 자위권을 발동,무력보복을 할 수 있지만 자살테러로 가해자가 사망한 상태여서 배후 조종이나 공모 사실이 뚜렷이 밝혀지기 전에는 공격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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