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모자랐던 지난 30년간은 저미가(低米價) 정책으로 농촌을 ‘갈취’하더니 이제는 쌀이좀 안 팔린다고 아예 농사를 포기하는 ‘살농(殺農)정책’을 하겠다니, 나라님이 농사꾼을 죽이려 하는모양이다.”충남 서산에서 쌀농사를 짓는 김모(57)씨는 황금들녘 앞에서 울화통을 터뜨렸다. 사상 유례 없는 가뭄 속에서 대풍작을 일궈냈지만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정부의 쌀정책 변경 소식에 그의 가슴은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전남 나주평야에서도 옥토로 이름 높은 동강면 진천리 들녘에서 30년간 쌀 농사를 지어온 박원기(60)씨.
“농사꾼이 풍년을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며 혀를 차는 그는 “추수 이후에 드는 비용이 전체 쌀농사 비용의 30% 이상을 차지하니 지금보다 값이더 떨어지면 차라리 수확을 안 하는게 낫다”고 한숨을 내쉰다.
빚이 많은 박씨는 당장 올 겨울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여서 내년 농사비 마련은생각도 못하고 있다.
두 사람 뿐만이 아니다. 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벌판을 바라보는 농심은 풍요롭기는 커녕 허탈하기만 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술 한잔에 분노로 바뀌어 폭발하고, 두서넛만 모여도 정부의 쌀정책 부재에 대한 성토가 이어진다.
쌀 소비가 현격히준 가운데 수년째 풍년 농사가 이어져 양곡창고마다 쌀이 넘쳐나는 상태에서 장기적으로 쌀 증산정책을 포기하고 수매물량을 대폭 줄여나가겠다는 정부의최근 발표는 농심을 결정적으로 자극했다.
농촌은 이미 사실상 파산상태다.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한농연) 정책연구실에 따르면 1991년 농가당 부채가 519만1,000원이던 것이 99년에는 1,853만5,000원으로357% 급증했고 농가소득 대비 부채비율도 91년 39.6%에서 98년에는 83%로 증가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000가구당 8.2농가가 부채로자산을 경매처분 당했고 파산했거나 파산위기에 직면한 농가수도 전체농가의 1.73%인 2만3,930호에 달한다.
한농연의 한 관계자는 “농촌이 붕괴하는판에 정부는 쌀농사를 포기하겠다고 했으니 농민들이 격노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농사에 난다 긴다’하는 농사꾼들도 이 모양이니 IMF 직후 귀농했던 농민들이 고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1998년말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에서 퇴출 당한 뒤 친구3명과 함께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에 정착한 귀농인 윤재석(尹載奭ㆍ40)씨는 조만간 농사를 그만두고 다시 상경해 허드렛일이라도 할 생각이다.
지난2년간 6,600여평의 논밭을 경작했지만 도대체 수지타산이 맞질 않기 때문이다. 연간 3,000여만원을 벌었는데, 농기계 할부대금과 농약값 기름값등을 제외한 순수익은 400만원에 불과해 자신의 인건비를 빼고 나면 밑져도 한참 밑진다.
그는 “올해 쌀값이 폭락하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며“새로운 삶을 찾고 고향도 지키겠다는 생각에 내려왔는데, 현실은 전혀 그게 아니었다”고 허탈해 했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 따르면 귀농 농민은 98년 3월 2,857명이던 것이 지난해 12월에는 158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연구팀이 지난 2월전국의 귀농인 52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56%가 ‘귀농선택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으며 62%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고 응답했다. 물론 이유는 ‘낮은 소득’(31.6%) 때문이었다.
농촌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물러설 곳이 없는 농민들은 투사로 변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한농연 등 농민단체들은 일제히정부의 쌀포기정책 철회를 촉구하며 ‘전면전’을 선포하고 나섰다.
전농 광주ㆍ전남연맹과 경남ㆍ경북연맹은 15일 오후 광주와 경남 창원에서 ‘한ㆍ칠레자유무역협정 저지, 수입쌀 반대, 쌀생산 쟁취를 농민대회’를 개최키로 하는등 산발적으로 전개돼온 농민집회도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11월과12월 ‘농가부채 탕감을 위한 100만 농민 총궐기대회’에 이어 또 한차례전국 규모 농민시위까지 예고되고 있다.
전농 관계자는 “우루과이 라운드(UR)등쌀에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물론 마늘까지 외국산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그래도 쌀 만큼은 정부가 책임지고 지켜줄 것으로 믿었다“며 “정부가 쌀 증산정책을 포기한다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셈’이라며”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농촌이 무너져 내리고있지만 그래도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지 못한다. 식량자원의 보호와 농촌경제 지지, 식량무기화 대응 등 어려운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우리까지땅을 버리면 어쩌겠냐”는 농민들의 답답한 말 속에 숨어있는 뜻을 수천년 농경으로 살아온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광주=김종구기자
sori@hk.co.kr
창원=이동렬기자
dylee@hk.co.kr
■쌀전업농 경남 도연합회 김성춘회장
“도대체 풍년이 들었는데도 농사꾼이 한숨 짓는 나라가어디 있습니까”
쌀전업농 경남도연합회 회장 김성춘(金成春ㆍ55)씨는 “자식 같은 벼 한 포기를 살리기 위해 봄 가뭄에는 밤새워 양수기를 돌리고 뙤약볕에 병충해 방제에 나서 대풍작을 이뤘는데…”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정부의 전업농정책에 맞춰 지난 1997년 정부로부터 수천만원을 빌려 농작면적을 3,000평에서 9,000평으로 늘린 전형적인 전업농.
경남지역 9,000여 전업농들을 모아 1999년 2월 쌀전업농 경남도 연합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으며 지난 1월 제2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전업농 변신을 후회하는 듯했다. 몇 년만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빚을 갚고 부농의 꿈을 이룰 줄 알았는데,아직도 5,000여만원의 빚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얼마전까지 정부의 영농정책에 불만을 터뜨리는 연합회 회원들을 다둑거리며 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나서 또 빚을 내면서도 우리마저 쌀농사를 포기하면 안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와서 정부가 쌀 수매조차 거부하겠다니, 쌀과 (우리) 농민을 버리겠다는말이 아니냐”고 허탈해 했다.
그는 정부가 수매중단 발표를 번복하지 않으면 연합회 회원들과 함께 쌀 농사를 포기하고 전업농 대출금을 현물(쌀)로 갚을 계획이다.
미질(米質) 및 생산성 향상, 친환경 농업 정보 교환 등이 연합회의 주요 활동이지만 잘못된 농정에 대항하고, 분노한 농민들의 목소리를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씨는 “100%전량 수매는 못해줄 망정 수매를 중단하고 쌀 증산정책을 포기하겠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농정실패를 인정하고 농민을 살릴 수있는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동렬기자
dylee@hk.co.kr
■전업농 박종석씨의 영농 가계부
종자값 3만2,000원,농약값 2만원, 트랙터와 콤바인 이용료 5만5,000원, 건조비 6,000원, 모종 상자값 2,000원….
쌀 전업농 박종석(朴鍾石ㆍ53ㆍ전남나주시 동강면)씨가 벼농사 200평을 지을 때 든 비용을 적은 영농 가계부의 일부다. 모두 18만5,000원.
수입은 평균 수확량280㎏, 가마니(80㎏들이)당 15만원(시중 가격)으로 계산하면 약 52만5.000원 정도. 200평 기준으로 34만원의 수익을 올리는 셈이다.
그러나 박씨는 영농가계부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올해 농사는 대풍작이었는데, 본전도 건지기 힘들다고 했다. 왜 그럴까?
박씨는 둘째 아들부부와 함께 자신의 논 1만4,000평과 임대 논 1만2,000평 등 모두 2만6,000평에 벼농사를 짓는 전업농이다. 200평 수입을 기준으로할 때 박씨 가정의 올해 예상 수입은 6,820만원이다.
그러나 토지임대료(1,200만원)와 정부지원금 상환금(910만원), 영농비(2,405만원)등으로 4,515만원을 제하면 2,305만원의 순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언뜻 적지않는 수입인 듯하지만 박씨와 아들 부부의 임금비를 감안하면 엄청난적자다.
뿐만 아니라 농ㆍ축협등에서 빌려 쓴 농자금 원금 및 이자 상환액이 올해 1,840만원이나 되고, 두 가족 생활비와 경조사비 농기계 할부금 및 수리비 등도 적지 않다.
지난 1995과97년 각각 5,300만원과 4,500만원의 정부 지원을 받아 농지 7,000여평을 구입해 전업농으로 변신한 박씨는 IMF 위기 이전까지만 해도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구입한 땅값과 쌀값이 올라 농사짓는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평당 3만원을웃돌던 땅값이 지난해부터 2만5,000원대로, 쌀값은 가마니당 15만원대로 떨어지면서 박씨는 “살 맛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아예 논을 팔아부채를 갚고 아들 부부와 함께 도시로 나가 막노동을 해도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답답해 했다.
김종구기자
so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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