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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7)소설가 에리히 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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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의 독일이야기] (7)소설가 에리히 뢰스트

입력
2001.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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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가 에리히 뢰스트를 처음 만난 것은 독문학자 한스 마이어의 추모회겸 명예시민 수여식이 있었던 라이프치히 독일도서관 1층 거대한 독회실에서였다.그는 그날 초청연사이며 마이어의 제자인 소설가 크리스타 볼프, 크리스토프하인과 조금 떨어진 중앙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뢰스트는 이미 1996년 라이프치히 시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됐었다. 행사 후 옆방에 마련된다과회에서 난 뢰스트와 첫 상견례를 했다.

그는 마침 작센산 검붉은 포도주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 1981년 출간된 그의 소설 '대지를뚫는 균열'의 옥중일기 속에 등장하는 두 병의 검붉은 자두주스를 상기시켰다.

1926년 출생인 그는 33세 되던 1959년 당시 구동독 당서기장 울브리히트의노선을 비판한 후 소위 뢰스트 국가전복죄 사건으로 전격 체포돼 악명 높은 바우첸 정보부 정치범감옥 독방에 던져졌다.

그가 그 감옥을 나와 아내아넬리스에게 돌아가는 데는 무려 7년이 걸렸다. 석방되던 날 그의 고독한 감방에 남은 것은 일곱 개의 양파, 반 병의 겨자, 두 병의 검붉은 자두주스가 전부였다.

그는 내가 라이프치히대학 독일문학연구소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반겼다. “내가 그 대학 제1회 졸업생이란 걸 아시오?” 한 달 반 전 75세의 생일을 맞았던 건강한 목소리로 그가 내게 물었다.

그의 폭풍 같은 인생유전은 16세 생일 식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날 그의부친은 자신의 1차대전 참전 유물인 파라벨룸 9㎜권총 한 자루를 생일 식탁에 내어놓았다.

뢰스트는 그의 조부도 이따금 1866년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참패시켰던 샤스포 장총을 손질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친이 말했다.

“생일선물이다. 너도 이젠 다 자랐어. 이것으로 쓸데없는 짓은 마라. 그러나 총을 쏠 수 없는 자는 집 밖에선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잊지말거라.”

집 밖이란 물론 전쟁을 의미했다. 집안의 남자 3대가 집 밖에 항상 역신처럼 전쟁이 잠복해있는 그 시절을 살아냈다.

그것이 조국 독일의 근대사였다. 16세 때 생일 탁자 위에 놓여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증여된 그 권총 한자루.

손 안에 느껴지던 권총의 그 운명적 무게. 그것이 소년 뢰스트가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상속 받은 그 시대의 재앙이었다.

그도 그의 부친도모두 ‘수류탄이 정의이던 시대’의 불행한 거주자들이었다. 그가 소년 시절엔 히틀러소년단을 자원했고, 청년 시절엔 예비장교 후보생으로 2차대전에 참여한 것은 그래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쓰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우리 가문의 남자란 남자는 모두 전쟁포로가 되었다. 우리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지만 피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또 내 학교동창 중 절반이 전사했다. 물론 생존해 고향에 돌아온 자도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손에 소총을 들고 전쟁에 나갔던 왕년의 히틀러 소년단원인 그의 순진함과 신념은 결국 미군포로수용소 장교캠프에서 비참하게 끝이났다.

동독 건국 후 그는 당에 입당했고 당에 대한 그의 신념도 결국 좌초되어 투옥된다. 당과 정보국의 탄압과 사상가 루카치, 블로흐, 마이어의 저항이 어울려 뿜어내는 갈등의 화약 냄새가 구동독을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글의 한 구절, 문자의 한 언덕만 넘어서면 그곳엔 천길 벼랑,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 그는 당시를 회상한다.

결국 그는 7년 동안 작가 뢰스트가 아닌 수인번호 23/59의 정치범으로서 혹독한 구동독의 정치적테러를 치러낸다.

석방 15년 후인 1981년 그는 다시 동독 정부의 야만한 검열조치에 항거, 동독작가연맹에서 탈퇴한 후 서독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통일이 되었을 때 그는 망명지인 서독의 본에 사망한 아내 아넬리스를 매장한 후 자신의 문학적 고향인 라이프치히로 극적인 귀향을 한다.

결국 동서독을 오가며 계속됐던 그의 오디세우스적 방황은 마침내 자신의 문학적 고향인 라이프치히에서 그렇게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올해 75세의 소설가 뢰스트의 삶은 그래서 마치 그 시대 한 독일 남자가쓴 75페이지짜리 이력서의 견본 같다.

그곳에선 순진한 신념과 교활한 현실 사이에서 전쟁, 감옥, 망명이라는 극단적 삶의 경계를 넘으며 자기 시대를 숨막히게 살아온 한 지식인의 고단한 땀냄새가 끼쳐온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현실기록적이며 통속적이라는 일부 문학평론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구동독 시민들은 요동치는 역사 속에서 정직한 정열로 자기 삶을 계속 수정하며 정화시켜 낸 이 남자의 건강한 지조에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이 75세의 오디세우스는 말한다 “나는삶에 대한 내 순진함에 톡톡한 값을 치렀다.”

1968년 5월 30일, 당시 구동독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와 그의 사회통일당은 라이프치히 칼마르크스 광장에 있는 당시 728년 된 대학교회인 파울린 교회를 폭파했다.

뢰스트는 그것을 ‘교회살해’라고쓴다. “칼마르크스 광장은 더 이상 그의 광장에 서 있는 그 아름다운 교회를 참을 수 없어했다.

교회란 생산성의 노예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겐 생산성 없는 애수적 교태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살해를 결정했다.

당시 이 교회 폭파를 정식 반대한 사람은 오직 라우쉬라는 목사 한사람뿐이었다.” 폭파 작업까지는 3주가 걸렸다.

대학생들은 학살이 예고된 교회 담장에 장미를 던지며 소위 장미시위를 했으나 헛수고였다. 폭약이대지에 설치됐고 뇌관이 점화됐으며 이삼천 명의 시민들이 눈물로 그 교회의 폭파를 지켜보았다.

“나도 그날 그 군중 속에 끼어 있었다”고 뢰스트는 고백한다. “그날 석양은 소리없이 우리들머리 위에서 일몰 중이었다.

그날밤 게반트하우스와 오페라하우스, 대극장에서는 공연이 계속됐고, 작가들은 계속 글을썼고, 화가는 그림을 그렸고, 울브리히트는 밤새 그의 승리를 건배했다.

전진만이 최고의 가치였고 모든 것이 잊혀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뢰스트는 놀라운 보고를 하고 있다.

“파울린 교회가 엄청난 폭발음 속에서 먼지 속의 폐허가 되어 무너졌을 때 그 뒤에 가려져있던 성 니콜라이 교회의 탑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20년 후 니콜라이 교회는 독일을 통일로 이끈 그 유명한 라이프치히 무혈혁명의 탄생지가 된다.

결국 20년 후 니콜라이 교회는 파울린교회에 대한 동독의 교회 살해에 그렇게 ‘장엄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통독 후 그의 최대의 성공작인 소설 ‘니콜라이 교회’ 속에 파도치는 정서이다. 신문 연재 후 최근 출간된 소설 ‘제국재판소’와함께 ‘니콜라이 교회’ ‘민중대첩비’는그가 문학적 고향 라이프치히에 바치는 도도한 3부작 소설이다.

그는 요즘 중부독일방송국의 청탁으로 2003년 50주년 기념일에 방영될 1953년 6월 17일 동독 노동자봉기사건에 관한 방송극을 쓰고 있다.

혹독한 감옥생활과 망명생활을 함께 견뎌준 아내 아넬리스에 대한 신의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독신인 채 장남이며 자기 저서의 출판자인 린덴출판사 대표 토머스 뢰스트와 이따금 서양장기를 두며 라이프치히 카셀로에 살고 있다.

그는말한다. “구동독은 거대한 밀케 주식회사였죠. 그러나 난 증오를 싫어해요. 증오란 패배자들의 아편이거든요.” 밀케는 지난해 베를린 한 양로원에서 사망한 악명높은 구동독 정보국장 에리히 밀케의 이름을 가리킨다.

/재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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