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끝난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는 노예제도를 반인류ㆍ반인종 범죄로 규정했다. 공허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시절 아시아 아프리카 인을 짐승 다루듯 한 서구 국가들이 공식 사죄와 함께 피해국 지원 의무를 인정한 점이 의미 있다.그러나 국가 대표들이 상징적 과거 청산에 합의한 것으로 논란이 끝나진 않았다. 국가간 배상 요구는 철회했지만, 피해자 후손들의 개별 민사 소송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 그 결과가 관심거리다.
■우선 미국의 일급 흑인 변호사들이 노예 후손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 초 시작될 소송은 과거 노예 사용 기업과 국가를 상대로 수천억 달러 배상을 요구, 사상 최대 송사가 될 전망이다.
추이에 따라 아메리카 인디언은 물론,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과 남아공의 부시맨 후손 등도 뒤따를 태세다.
여기에 2차 대전 등 역사 속의 불의(不義)를 다시 끌어내 그 빚을 받으려는 움직임이 잇따라, 범세계적 ‘역사 소송’ 사태마저 예상된다.
■우리 동포들의 일제 피해 배상소송도 국가 범죄를 민사 법정에 세운 선례다. 그러나 최근 역사 소송 붐은 미국에 사는 나치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낸 것이 촉발했다.
독일측은 미국 시장 접근을 방해하려는 음모를 의심했으나 기업 이미지 추락을 우려, 대리인으로 나선 미국 정부와 거액 배상에 합의했다.
나치 죄과를 성실하게 갚아 온 독일다운 선택이지만, 이번에는 울며 겨자 먹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새삼 역사 소송 붐인가. 냉전 시대 구원(舊怨)을 서로 덮었던 우호 국가들의 이기적 변신 탓이란 지적이 흥미롭다.
그리스 법원은 최근 나치 범죄 배상소송에서 독일 문화원을 강제경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 아닌 일본과의 전후 청산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모두 해결돼 개별 배상근거가 없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어쨌든 역사 소송 붐을 인류 보편적 정의 구현의 상징으로 환영하기는 이르다. 또 우리의 피해 역사뿐 아니라, 베트남 참전의 결과도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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