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비우기가 겁나요….” 외국계 정보통신(IT)업체에 다니는 김모(29ㆍ여)씨는 아직도 여름 휴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2주 연속으로 회사에 들어온 지 3년도 채 안된 입사동기 2명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해고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이 회사가 지난 7월부터 해고한 직원은 모두 12명. 집단 반발을 막기 위해 모두 휴가기간 중에 이루어졌다. 김씨는 “휴가를 가면 나도 잘릴 것 같아 올해에는 아예 휴가를 반납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주니어 사원’이 주 타깃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던 곽모(35)씨는 예고도 없이 해고통지서를 받은 케이스. 곽씨처럼 해고된 직원은 지난 한달 동안 6명이 넘는다. 곽씨는 “전 지점 상사에게 따져 봤으나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며 “노조도 없는 상태에서 쫓아내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외국계 기업 사원들이 ‘공포의 9월’을 맞고 있다. 전세계가 불황 조짐을 보이면서 대다수 다국적기업들이 10월부터 시작되는 새 회계연도에 맞춰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해고의 칼바람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하위직 10%부터 줄여 나간다는 외국계 기업의 ‘바텀(Bottom) 10’원칙 때문에 IMF 불황 속에서도 취업의 좁은 문을 통과했던 입사 1~3년차가 주 타깃이 되고 있어 파문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휴렛팩커드(한국HP)는 지난달까지 계약직 사원을 대거 퇴직시킨 후 이달말까지는 입사 1년차 미만의 사원을 대상으로 80~90명 정도의 감원을 계획 중이다.
루슨트테크놀로지, 시스코등 미국에서 대규모 감원계획 발표된 회사 직원들 사이에도 ‘언제 피바람이 불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마구잡이식 해고 물의
이들 업체의 구조조정을 싸잡아 비난할 수 만은 없는 일. 그러나 대다수 기업들이 계약조건을 지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람을 쫓아내고있어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국내 광고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1년전외국계 광고회사로부터 최고대우를 약속받고 이직한 정모(28)씨는 ‘경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입사 1년만에 회사를 나와야 했다. 정씨는 “이직 당시 최소한 5년간은 취업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았었다”며 “법적 대응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세계적인 외국계 IT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박모(29)씨는 요즘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박씨는 “이곳에 다녀봐야 직업의 안정성도 보장받지 못할 뿐 아니라 승진에도 한계가 있다”며 “99년 3~4곳의 국내기업에도 합격했었는 데 왜 여기를 택했는지 모르겠다”고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컨설팅업체 관계자는 “외국계기업들이 한국 노동시장의 특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들 기업에 입사하기 전에 근무조건을 문서화ㆍ명문화하는 등의 자구노력이 꼭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기철기자
kimin@hk.co.kr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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