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경의 세계 만화 탐사어린 시절, 부모 몰래 만화방에서 ‘독고탁’이나 ‘도전자 허리케인’ 혹은 ‘캔디’ 시리즈를 보던 흥분을 아직 간직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부모님이 태현실과 장욱제의 TV연속극 ‘여로’에울고 웃을 때 그들은 만화방에서 빌려온 만화를 키높이 만큼이나 쌓아놓고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읽어나갔다.
그들은만화가 주는 감동으로 세상을 어렴풋이 알아나갔고, 만화가 주는 재미에서 문화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 시절 만화의 세계는 좁디좁았다. 그 협소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세계만화는 아직도 우리 문화의 지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물가물한 저 수평선 너머에 어떤 섬, 어떤 땅덩어리,어떤 보물이 있는지 그 소문조차도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오직 가까운 섬나라의 만화만 작은 구멍가게에 창궐할 뿐이다. 우리의 만화 문화는 국제성제로, 시계 제로의 편협하고 무지한 정치나 대학의 모습과 빼다박은 듯 닮았다.”
성완경(57) 인하대 미술교육과 교수는 세계만화를 탐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성완경의 세계 만화 탐사’는 한국 만화 문화의 편협성을 탈피해서 세계 만화의 수많은 ‘보물섬’들을 찾아낸 값진 항해의 결실이다.
1992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쥐’가만화로는 사상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쥐’의작가 아트 슈피겔만은 이렇게 말했다.
“만화는 연극보다 유연하고 영화보다 심오하다.” 슈피겔만의 말의 앞부분은 종횡무진 예측불허하는 만화의 상상력을 가리키고, 뒷부분은 이야기와 그림을 결합한 만화 장르만이 줄 수 있는 문예적 깊이를 강조한다.
프랑스에서는 “만화가 먼저 원심운동을 하면 철학이 나중에 그것을 추스른다”라는 말도 있다.
지은이 성 교수는 “굳이 만화를 영화, TV에 이은 ‘제9의 예술’이라 규정하지 않더라도 좋은 만화들은 예술이란 동네의 최고의 덕성, 곧 확실한 개성ㆍ실력ㆍ전위성ㆍ기질 등을 그 자체로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유럽ㆍ북남미 만화를 중심으로 한 세계만화의 역사를 씨줄로, 세계 만화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30여 명의 만화가의 작품세계를 날줄로 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
우선 ‘만화의 세계’에서그는 만화를 상식의 바깥, 제도화한 상상력의 바깥으로 우리를 내던지는 위험한 그래피티(graffitiㆍ낙서)라고 정의한다.
위험하고도 지적인 유머와 상상력으로 문화의 상투형을 깨트리는 것, 그것이 만화의 본질이며 그래서 만화야말로 20세기 최후의 종합예술이자 21세기형 멀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장르라는 것이다.
이어 근대적인 만화가 선보인 19세기초부터, ‘저자만화’가 확립된 1970년대를 거쳐 최근의 언더그라운드, 멀티미디어형 만화의 역사가 대표적 작품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된다.
책의 3부 ‘세계의 만화가들’은이 책의 중심부다. 세계 만화 거장들의 갤러리라 할 만하다.
100여 년 전 미국 일간신문의 컬러판 부록에 처음등장하기 시작한 초창기 만화의 대표작가 리처드 펠튼 아웃코트로부터,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무자비한 검열 아래서도 민중의 현실을 그려냈던 알베르토브레시아 등 서유럽과 동유럽, 미국과 남미의 대표적 작가들이 지역ㆍ장르별로 안배돼 소개됐다.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기수 로버트 크럼, 비타협적인 필치로 여성의 현실을 그려내는 클레르 브레테셰, ‘쥐’로 그림소설의 전통을 만들어온 아트 슈피겔만, 만화 외에도 영화ㆍ광고ㆍ사진 등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펼치는 멀티미디어 만화가 데이브 맥킨등의 작품세계와 생애가 간명하고도 깊이있게 펼쳐진다.
만화를 말하는 책이라 수록된 470여 컷의 만화작품들만 보아도 흥미롭지만 저자성 교수의 만화사랑에서 우러난 글솜씨도 빼어나다.
“만화는 재미가 생명이다. 하지만 그것이 ‘훌륭함’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지금부터 꼭 30년 전 대학원 시절 프랑스문화원(당시나는 이곳의 영화담당 직원이기도 했다)에서 불어권 만화를 처음 발견한 후, 지금까지 그 비밀스런 사랑의 접촉을 끊이지 않게 만든 것은 만화의 그‘탁월성’이다.”
이렇게 말하는 성 교수는 30여 년 간 수집한 자료들을 96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의에서 ‘써먹을’ 기회가 생겼고 이 책은 그러한 과정의 결실이다.
성 교수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고, 2002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부천 만화 정보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은이는 만화에 대한 애정을 1950년 탄생한 찰스 슐츠의 ‘피너츠’, 그 중 유명한 ‘사랑이란…(Love is…)’ 시리즈의 한 컷으로 대신 말한다. “사랑이란…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책을 빌려주는 것.”
하종오기자
jo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