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나 기관의 e 비즈니스를 기획, 제작 대행하는 웹에이전시 사업을 하면서 가장 고심하는 것은 고객사만의 웹 아이덴티티(web identity), 즉 그 회사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조해 내는 일이다.고객사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면서 인터넷 상에서 회사 이념과 철학을 총체적으로 잘 표현하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는 나에게도 정체성의 문제를 새삼 자각할 수 있는기회가 있었다.
1995년 ‘멀티미디어’ ‘디자인’이 시대적인 화제였던 때, 삼성디자인연구원에서 미국디자인학교 ACCD와 연계한 1년 6개월간에 걸친 연수 프로그램은 한국인으로서의 나를 재조명하게 만든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시간의 축을 따라 세계 각 지역의 문화를 탐방하면서 교과서로만 보던 인류의 문화유산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중국의 진시황릉, 인도의 타지마할,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피렌체 등에서 내가 본 것은 단순한 문화 유산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문물에 담긴 그 문화권의 혼과 시대정신이었다.
타지마할은 놀라움의 장관이었다. 대리석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박아 놓아 하나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 놓은 이 건축물에서 우주를 지향하는 인도의 정신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기적에 가까운 이 거대한 건축구조가 절대 황권시대에서나 가능했다는 점에서 시대적 맥락도 읽을 수 있었다.
그외에도 디자인의 발상지인 독일의 바우하우스와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모더니즘정신을, 미국 워싱턴과 뉴욕에서 팝아트와 대중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만 배웠던 지식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나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느꼈다. 나와는 크게 상관 없다고 여겼던 인류의 문화 유산들이 장중한 역사의 강물을 타고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시대정신과 우리 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게 했다. 나는그동안 나와 나를 존재하게 한 나의 주변들, 시대적 그리고 역사적 문맥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속에만 갇혀 있었다.
‘빠다 냄새나게 해달라.’ 에이전시 사업을 하면서도 자주 이런 말을 듣는다. 이럴 때 나는 사실 당혹스러워진다. 해외시장을 목표로 해서 우리 기업의 상품을 세계무대에 올려 놓겠다는 열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만이 가진 독특한 기업정신과 철학이 담긴 커뮤니티가 최고의 경쟁력을 만들어 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빠다냄새나는’ 사람들이 아닌 한국인으로서의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디자인스톰 손정숙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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