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1일오전 11시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 지방에 매그니튜드 7.9, 최대 진도 7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즉각 대규모의화재와 쓰나미(해일), 토네이도로 이어지며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를 파괴했다.일본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이 지진으로 사망자 9만9,331명,행방불명 4만3,476명, 가옥 전파(全破) 12만8,266동, 반파(半破) 12만6,233동, 소실 44만7,128동, 유실 868동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런 자연적 피해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간토 대지진은 이 재난의 수습 과정에서 일어난 조선인 집단 학살로 20세기사에 악명을 남겼다.
한 사회가 위기를맞았을 때, 그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사회의 소수파를 증오의 표적으로 만들어 그들을 박해하는 예는 역사상 수없이 반복돼 왔다. 간토 대지진 때선택된 희생양은 조선인들이었다.
경제불황 속에서 만난 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지진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조선인들이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일본 정부는 이 유언비어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특수공작대를 만들어 테러 활동을 조작했고, 여기에 경악한 일본인들에 의해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일본인자경단이 살해한 조선인의 숫자는 가장 보수적인 통계에 의하더라도 2,500명이 넘고, 문헌에 따라서는 6,000명을 넘어섰다.
일본 정부는 또 이혼란을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좌익 세력을 뿌리뽑기 위한 기회로 삼아, 노동운동가 히라사자와 게이시치(平澤計七), 사회주의 지도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부부 등 일본의 진보적 인사 수십 명을 검거해 살해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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