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 동시상영관에 걸리는 두 편 영화중의 한 편은 ‘중국(실은 홍콩) 영화’일 확률이 컸다.60년대 왕우 주연의 ‘외팔이 시리즈’ ‘협녀’, 70년대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 ‘용쟁호투’ 등 중국 무협영화는 한국 청소년들의 ‘순진한’ 일탈의 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가 밀려오면서 중국 영화는 ‘싸구려’ 영화로 밀려났고, 홍콩 영화가 성룡의 코믹 액션, ‘첩혈쌍웅’ 류의 느와르로 새 활로를 찾으며 정통 ‘무협’의 전통은 사라졌다.
홍콩에서도 시들해진 무협이 한국에서 새로운 바람몰이를하고 있다. 평단의 평가와는 별개로 대중 무협소설이 조용히 큰인기를 누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무협’은 문화의 전면으로 세를 확장했다. 무협에 판타지를 가미한 소설과 게임, CF는 물론 블록버스터 영화의소재도 무협이다.
▼만화, 게임, 블록버스터까지
지난 해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대출빈도 50위권 안에 판타지 및 무협 시리즈가 27종(54%)을 차지했고, 다른 대학도 비슷하다.
김용의 ‘소설 영웅문’이 3위에 올랐다. 만화나 게임의 열기는 더하다. 야설록의 ‘녹수옥풍향’ ‘대무당파’ 을 비롯, ‘열혈강호’ ‘용비불패’등이 인기 절정, 3D게임인 ‘신영웅문’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 시장까지 노리고 있다. ‘묵향’ ‘조선협객전’ 등도게임으로 나왔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무협을 통해 새로운 소재 및 표현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 5세대 대표 감독 첸 카이거의 ‘몽유도원도’ 역시 삼국설화의 도미 이야기를 근거로 장대한 무협 스타일의 영화를 꿈꾼다.
방송작가 이환경씨가 영화에 첫 도전해 관심이 모아지는 ‘싸울아비’는 백제 열망 전후 일본으로 건너간 싸울아비(무사)와 일본 사무라이의 대결을 그렸다.
12월 평양에서도 상영될 예정이어서 더욱 관심이 크다. ‘미스터맘마’ ‘결혼 이야기’의 김의석 감독이 만들 ‘청풍명월’은 내년 봄 크랭크인한다 .
국내 TV 사상 처음으로 중국에서 올 로케할 예정인 KBS 미니시리즈 ‘사대신검’은 쌍둥이 형제가 명(明), 청(淸) 무림에 의해 양육되며 대결을 하는 운명적 비극이 줄거리. 인스턴트 자장면CF에서도 ‘내공’을 겨루는 무협 스타일이 등장하고 있다.
▼무협과 판타지의 조우
그러나 무협은 단순한 무협이 아니라 판타지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양식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통신 스타 고명윤의 ‘신궁’은 원(元)을 배경으로 한 무협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단순무식한 주인공의 유머를 빼놓지않는다.
11월 개봉 예정인 영화 ‘화산고’(감독 김태균)는‘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 류의 철저한 오락 영화로 학생들이장풍을 날리고 내공을 실어 날린 분필은 치명적인 살상 무기가 된다.
‘화산고’는 고교생들의 ‘일상’으로 엽기적 무협을 보여주고 있다. 와이어 액션을 이용한 환상적인 무공을 보여주기 위해 후반 작업만6개월을 잡았다.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는 “영화 ‘무사’가 와이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 한국적 무협의 전통을 선보였다면, ‘화산고’는 판타지를 표현하기 위해 무협을 차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국지를 21세기형 판타지 버전으로 바꾼 게임 ‘트라이킹덤’은 한마디로 엽기적이다. ‘조조’가 13세 소녀가 됐다.
오컬트(초자연)에 무협, 판타지를 가미한 소설 ‘퇴마록’ 역시 신세대들의 호응 속에 19권으로완간됐다.
▼왜 무협인가
‘매트릭스’가 동양 무협의 옷을 입은 사이버적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면, ‘와호장룡’은 와이어 액션 등 그야말로 판타스틱한 무예의 세계를 서양식 영화 화법으로 풀어냈다. ‘무협’의 가장 큰 매력은 무협이 현실세계의 정의를 가장 비현실적 방법으로 구현한다는 데 있다.
인터넷을 즐기는 이들이 많은 나라가 역시 ‘헬스와 피트니스(몸의단련)’에 투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두 가지 욕망이 반드시 상반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초월적 자아에 대한 지향, 그 지향이‘무림고수의 일합(一合)’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무협이 가진 비현실성은 모든 것을 ‘엽기’ 코드로 해석하는 요즘 신세대들의 취향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이소룡이 ‘맹룡과강’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노란색 트레이닝복이 ‘엽기 의상’으로 인터넷 온라인 상점에올라 있다.
무협에 엽기성과 판타지를 더하면 신세대들이 열광할 만한 ‘문화 상품’이 될 수 있다는 부분을 암시하는 것이다.
동양적 무협은 있으되,아직 ‘한국적 무협’은 제대로 위상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 막 불기 시작한 ‘무협’ 바람은 그 새로운 지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무협의 새로운 강자는 한국? 한국적 무협을 지향한 대작 영화 '무사' 무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것
박은주기자
jupe@hk.co.kr
■"무협 블럭버스터란 이런것"
순제작비 56억원, 중국 올 로케이션, 정우성 장쯔이, ‘태양은 없다’의 김성수 감독, 그리고 무협 영화.
이 다섯가지 요소만으로 영화 ‘무사’는 충분히 화제꺼리다. 사람들은 묻는다.“재미있냐”고. 그런데 이 영화의 재미는 ‘비천무’나 ‘단적비연수’가 주는 ‘재미’와는 아예 출발이 다르다.
와이어 액션도,영웅담도, 짜증은 나지만 어쨌든 눈길을 잡는 로맨스도 없다. ‘무사’의 예술적 성과이자 동시에 투자자를 다소 초조하게 만드는 부담이기도하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원(元)에서 명(明)으로 넘어가는 이땅과 중국 땅 모두 지극한 혼란기였다.1375년 명에 간 장군 최정(주진모)은 부사 이지헌(송재호) 일행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하고, 9명의 무사는 원의 첩자란 누명을 쓰고 귀양길에 오른다.
최정의 부관인 용호군 별장 가남(박정학), 통문관 말직인역관 주명(박용우)과 주진군 하급무사 진립(안성기)은 사막에서 원군의 습격을 받고 고려로 돌아가는 기회를 잡게 된다.
고된 행군에 지친 부사가죽기 직전 그의 노비인 여솔(정우성)을 속량하고, 여솔은 일행에 합류한다. 원군에 인질로 잡힌 명의 부용공주를 구해내면서 이들은 행로는 달라진다.
‘무사’는 절대무공의 협객이 등장하지 않는다. 원군에 쫓기는 부용공주를 구하기 위해 여솔이 대나무 밭에서 신기에 가까운 창술을 보여 주지만, ‘와호장룡’에서 보여준 발레에 가까운 무예는 없다.
그들은 오로지 살아 남기 위해, 공포에 사로잡혀 적의 머리를 베고 배를 가르고 활을 쏜다. 죽은 아버지 대신 부역을 나온하일은 단창을 던지고, 잡초처럼 살아온 농민 도충은 도끼를 휘두른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계급 갈등’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부용공주에대한 사랑 때문에 행로를 바꾸었으면서도 ‘사신으로서의 명분’을 운운하는 장군은 점차 병사들로부터 불신을 당하고, 장군은 마침내하급무사 진립에게 조차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생사가 엇갈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병사들에게는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진짜 ‘장군’이었다.
한 무리의 명 유랑객들에게도‘공주’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다. 공주 때문에원군에게 떼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공주를 외면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싸운다. 공주가 의지할 곳 없는 한 여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임산부를 위해 물을 구하려 가다화살에 꽂혀 죽은 소년 단생이나 칼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역관 주명 모두 ‘무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웃사이더적이고,반계급적이며, 도발적이다. 물론 이런 갈등은 ‘휴머니즘’으로 포장되는데, 오히려 이런 애매한 노선이 ‘이야기가 흩어진다’는 비평을 자초한지 모른다. 영웅과또 다른 영웅의 대결과 삼각관계에만 집중하지 않는 관습적 구도에 빠지지 않은 것은 이 영화의 미덕이다.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유인이야”를 외치는 천편일률적 캐릭터의 정우성, 좀 더 캐릭터를 휘어잡았으면 좋았을 주진모, ‘공주’가 아니라 ‘성주의 딸’ 정도로 설정했으면 좋았을 법한 장쯔이.
그러나영화의 균형을 잡고 있는 안성기의 믿음직스런 연기와 탄탄한 조연들, 현란한 영상이 오랜 잔상을 남긴다.
무협 블록버스터 ‘무사’의 새로운 길은 이전 것 보다 진보한 것만은 틀림없다. 9월7일 개봉.
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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