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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號 재판 의미 / 日 '빗나간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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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號 재판 의미 / 日 '빗나간 판결'

입력
2001.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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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일본 교토(京都)지법의 우키시마(浮島)호 사건 생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은 일제에 의해 초래된 대참사에 대해 54년 만에 처음으로 구제 조치가 취해졌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지금까지 일본에서 제기됐거나 계류중인 이른바 ‘전후 보상’ 소송 50여건 가운데 원고측의 주장이 일부나마 인정된 것은 이번 판결을 포함, 3건에 지나지 않는다.

폭파 침몰의 ‘불가항력’, 한국인 강제 징용에 대한 무책임을 주장해온 일본 정부도 즉각 공식 담화를 발표하는 등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9년 가까이 법정투쟁을 벌여온 희생자 및 유족 입장에서는 사건의 본질을 피해나간 ‘빗나간 판결’일 수밖에 없다. 원고측은 처음부터 이번 사건의 초점을 진상규명에 두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측은 ▦일본 해군의 폭파설을 비롯한 침몰원인 ▦ 5,000여명이라는 숫자가 거론되고 있는 희생자 규모 등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증언과 증거들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는 폭파직전 일본 군인들이 배를 떠나거나 짐을 들어냈다는 증언, 선박이 한국쪽으로 직항하지 않고 무리하게 마이즈루 항으로 회항한 점 등 구체성을 띤 것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같은 의문들에도 불구, “일본이 징용자들을 부산까지 안전하게 수송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을 뿐이다.

국가 차원의 사죄와, 생존자가 아닌 유족들에 대한 배상 부분이 기각된 것은 도리어 일본군 군대위안부 등 다른 전후 보상 소송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일련의 배상 소송에서 원고들은 메이지(明治) 헌법의 전문을 근거로 들어 “전쟁피해를 구제하는 입법조치를 취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이른바 ‘국가 입법부작위론’을 내세워왔다.

그러나 교토지법 재판부는 “입법 부작위에 대한 책임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한다”는 최고재판소의 판례를 답습해 ‘포괄적인 배상 의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 사죄요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지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해 사건의 진상규명에 대해서는 사실상 회피했다.

결국 이번 교토지법의 판결은 작은 진전일 뿐 역사적인 의미는 전무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이 과거를 스스로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또다시 놓쳤다” 는 지적과 함께 피해자들이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이번 판결은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들의 56주기인 24일을 하루 앞두고 내려진 것이다.

생존자와 유족 및 관계 단체들은 이날 마이즈루 시내 위령비 앞에서 조촐한 위령제를 가질 예정이다.

유승우기자

swyoo@hk.co.kr

■우키시마호 사건이란?

‘우키시마(浮島)호 사건’은 1945년 8월24일 강제 징용됐던 조선인 7,000여명(일본 공식집계 3,700명)을 태운 4,730톤급 일본 해군함 우키시마호가 일본 교토(京都)시 인근마이즈루(舞鶴)항 근해에서 폭발, 침몰하면서 수천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를 말한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미군측이 설치한기뢰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것으로 발표했으나 일본 해군이 징용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을 은폐하고 선상반란을 막기 위해 폭탄을 설치했다는주장이 제기되는 등 아직까지 사건 경위와 침몰 원인 등이 베일에 쌓여있다.

당시 500여명의 생존자들은 “폭발소리가들리기 10분전에 일본 해군 300여명이 소지품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다”며 고의적 폭파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1954년 10월 인양 당시 배의 바닥 구멍은 바깥방향으로 뚫려있었던 점도 내부폭발의 명백한 증거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침몰 전 폭발 소리가 3~4회 들렸고, 물기둥이 50~60㎙나 솟아오른 현상은 기뢰에 의한 폭발로 볼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일본의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증언을추진하는 모임’ 등 한일 시민 단체들의 잇단 증언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태.

이 사건은 1999년 북한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영화로 제작됐으며, 이 영화는 현재 남측에서 상영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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