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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휴가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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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휴가 유감(有感)

입력
2001.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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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출퇴근길이 다시 번잡해지는 걸 보니 휴가도 거의 끝물인 모양이다.여름 휴가철의 텅 빈 도심 풍경이 낯설지 않게 다가옴을 느끼며 우리에게도 휴가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정착되었음을 실감케 된다.휴가에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 무의미함을 뒤로 한 채잠시 쉬어본다는 것일 게다. 한데 휴가 강박증으로부터 휴가 후유증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휴가 자화상만큼은 유감 천만이다.

인천 국제공항 환전 창구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끝간 데를 모른 채 이어지고,이름난 해수욕장은 도무지 어디가 바다요 어디가 모래사장인지 구분이 안가며, 빼어난 계곡마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더미로 몸살을 앓는 모습은 예년이나 올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어디가 물이요 어디가 뭍인지 모른 채 사람들 틈에 섞여 부대끼다 돌아오는 그 맛에 휴가를 떠난다는 이들마저있다고 하니, 믿어도 좋을지...

일과 여가 혹은 휴식의 구분이 지금처럼 확연해진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요,여기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한 몫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산업화 이전 농경사회에서는 일과 여가가 다양한 의례 속에 하나로 통합되어있었고, 13세기 유럽에서는 사흘에 하루 꼴로 축제와 휴일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근 들어서는 무슨 일을 하느냐 만큼이나 어떤 여가를 즐길 수 있는지가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가의 의미가 적극 확대되고 있다.

여가시간 및 휴식공간을 둘러싸고 천문학적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고 있음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쉴 것인가조차도 자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재작년 여름 이맘 때, 방학을 이용해 집안 어른이 계신 시골집에 다니러 갔다.그 곳에는 여든을 훌쩍 넘기신 할머님 홀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터 뒷 켠 700여 평에 이르는 텃밭에 한 켠으로는 고추농사를 짓고 다른 한켠으로는 콩 밭을 가꾸고 계셨다.

그 해 여름은 유독 강한 비바람이 몰아쳤던 기억이 생생한데, 할머님 밭은 고추든콩이든 일일이 대를 세워 단단히 묶어놓으신 탓에 쓰러진 포기 하나 없이 꼿꼿하고도 가지런히 서 있었다.

여든 노인네의 솜씨라고는 아무도 믿지 못할만큼그렇게 다부지게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님의 변인 즉, "나는 한번 한다면 대강대강은 안하지. 다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라셨다.

고추는 햇볕에 정성껏 말려 곱게 빻고, 콩으로는 된장 청국장 쑨 후 철따라 자식들에게한 보따리씩 들려 보내시는 그 맛, 친구들 다니러 내려오면 꼭 한 끼라도 상 차려내신 후, 당신이 거둔 호박이며 상추며 오이며 가지 등을 한 꾸러미씩들려 보내시는 그 기분이 그만이라는 할머님.

아침 상에는 뒤꼍 한 귀퉁이에 심어놓은 정구지(부추) 뜯어 전을 부치시고, 된장자작하게 끓인 후 호박잎 데쳐서 함께 올려놓으셨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혀 밥 한 공기들을 후딱 해치웠다.

함께 밥상에 올랐던 찰옥수수의 때깔은왜 그리도 곱던지... 저녁이 되자 "예전에는 앞 마당에 분꽃이 오무라들면 저녁밥 할 때가 된 것을 알았노라"시며 주섬주섬 일어서는할머님의 뒷 모습에서 정감과 여유로움이 물씬 묻어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마음이 뿌듯해오는 것이, 이름 석자만대면 누구나 알만한 집안의 따님으로서 꼿꼿한 자존심 지키며 건강하게 살고 계신 할머님의 진솔한 삶에서 받은 감동 탓이려니 싶었다.

너도나도 떠난휴가길, 돌아오는 발걸음에 무료했던 일상을 향한 애정이 되살아나고, 무의미했던 삶의 자취가 되짚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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