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각계의 내로라하는 원로급 인사 115명이 간곡하게 국민적 통합노력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냈다. 현 시국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이 배인 문구, 참여 인사들의 중량감, 발표 시점 등으로 인해 큰 반향이 예상됐지만, 뜻밖에도 여론은 담담했다.참석자들은 성명서 곳곳에서 격앙된 표현으로 작금의 시국을 개탄했다. “지금이 땅에서는 옛 역사의 ‘낡은 장부’를 뒤적이면서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 살벌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원로들은 그 해결책으로 “진정한 ‘민주적공론의 광장’에서 진보와 보수, 중도가 모두 제 색깔을 당당히 드러내고 합리적 토론을 통해 ‘공동선(共同善)’ 을 추구할 것”을 제안했다.
구구절절이 옳은 상황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작 문제는 여기에 있어 보인다. 진보와 보수의 합리적 토론? 이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도대체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 진보와 보수 진영의 인사가 마주 앉아 그야말로 허심탄회하게서로의 견해를 조정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성명이 가슴에 그닥 와 닿지 않았던 것은 이런 비현실적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얘기하자면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 간에 접점이란 결코 있을수 없을 뿐더러, 있어 본 적도 없다. 모든 갈등이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성격으로 치환되는 순간 접점은 깨끗이 사라지는 법이다.
한번 따져보자. 요즘 일상화한 표현을 빌자면 진보진영의 목소리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커져 있는 지금 대체로 보수는 수구(守舊)이고 악(惡)이며, 진보는 개혁이자 선(善)이다.
심지어 보수인사들은 기득권을 지키려 웬만한 부조리는 필요악 정도로 치부하거나 외면해버리는, 말하자면 다소 비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갖고있는 사회적 ‘영향력’은 곧 정당치 못한 ‘권력’으로 간주된다. 언론권력이니,문화권력이니 하는 것 들이다.
당연히 반대편에 선진보세력은 의식이 깨인 양심세력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거꾸로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은 사사건건 불만에 사로잡혀 사회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분자들이며, 이들의 개혁주장은 어린아이에게 쥐어진 칼 만큼이나 아슬아슬하다.
서로의 간극이 이정도니, 매번 사회현안에 대한 논의가 온통 적개심 섞인 욕설들로 채워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더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경우 우리사회의 보수·진보가 이념적으로 그다지 명쾌하지도 않다는 데 있다.
지역감정에다 정파, 인맥, 이해관계 등 온갖 요소가 보수와 진보의 표피 밑에 이중삼중으로 교묘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도무지 ‘해결 불가’일 수 밖에 없고, ‘공동선’이 애당초 구두선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게 원로들이 그토록 개탄해마지않는 양극화 현상의 본질이다.
그러니 다른 해결방법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보수니, 진보니 하는 용어는폐기해 버리는 것이다. 대신 ‘합리와 비합리’로 대체하자.
사안을 보수나 진보 개념으로 접근하면 그건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선택의 문제가되고 말지만, 같은 논의도 합리성의 문제로 접근하면 달라진다. 우리 토론문화의 천박성을 십분 전제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견해가 더 합리적이냐는정도는 논의의 여지로 남을 것 아닌가.
언어는 의식을 담는 그릇이다. 다 낡아버려 이제는 그 구분조차 무의미해진 보수와 진보의 공허한 관념이 21세기 우리 사회 모든 갈등의 근저에 깔려있다는 건 정말 시대착오적이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분이야말로 우리의 시선을‘옛 역사의 낡은 장부’에 붙잡아 매는 주범이다.
이준희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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