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양심이여, 살아남은 자의 절규를 들으라.” 일본에 울려 퍼진 태평양전쟁 유족들의 피 맺힌 함성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14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대표이종진ㆍ李種鎭) 유족대표들은 일본 도쿄 중심가의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찾아 신사에 묻혀 있는 한국인 합사 대상자, 소송 원고단 명단과 함께 합사 취하 요청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 우익단체 회원 등이 신사 출입을 막아 진통을 거듭했다.
이날 오후2시 야스쿠니 신사정문에 들어서던 유족대표 이희자(李熙子ㆍ58ㆍ여)씨와 소송 지원을 맡고 있는 오구찌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 등 일본 시민단체 회원 20여명은 “조센진카에레(조선인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신사 진입을 막은 30여명의 우익단체 회원들에게 막혀 1시간 동안 신사 출입이 봉쇄됐다.
‘합사 취소는 없다’는 플래카드와 일장기를 들고 나타난 우익단체 회원들은“신령한 신이 사는 곳에 조선인은 들어올 수 없다”며 한국 희생자 유족의 출입을 막았다.
당초 야스쿠니 신사측은 유족들의 요청서를 받기로 구두 합의했으나 며칠 전부터 계속된 한국인 유족들의 시위에 겁을 먹어 우익단체를 동원했다고 현지 시민들은 전했다. 다행히 오후3시께 신사측이 유족대표와 통역 1인의 출입을 허용해 요청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유족 대표 이씨는 정문에서일본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조선인은 들어올 수 없다는 신사에 한국인을 합사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선친의 넋이 있는 곳조차 마음대로 올 수 없다니…”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태평양전쟁한국인 희생자 대표들은 일본 도쿄(東京)도 나가타쵸(永田町)에 있는 내각 총리부와 후생성에 야스쿠니(靖國) 신사 한국인 합사 취하를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김경석(金景錫ㆍ75)씨는“일본인을 위한 신사에 식민지 백성으로 강제 연행된 한국인 희생자의 넋을 신사에 묶어두는 것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짓밟는 일”이라며“일본정부가 합사 철폐를 하지 않는 한 한ㆍ일간 우정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친이 신사에 합사된 유족대표이씨는 “일본 정부가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반세기를 버텨 온 유족에게 생사여부를 알리지도 않은 채 야스쿠니 신사측에만 통보해 합사한 것은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소리높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유족들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겠다”는 답변만 되풀이 해 유족들의 원성을 샀다.
한편 전날 고이즈미 총리의갑작스런 신사 참배 소식을 접한 일본 현지의 유족 대표들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이날 일본에 도착한 유족대표 이씨는 비보를 듣고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일본에 오기 전 응급실에 누워있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이씨는 오로지 신사 참배 저지를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이씨는 “유족들의 외침은 외면한 채 비밀리에 신사 참배를 강행한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예상치 못한 신사 참배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의 양심세력과 종교ㆍ시민단체 등은 ‘총리의 신사참배가 정교분리를 내세우는 헌법에 위배된다’며 위헌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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