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3일 오후 전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것은 국내외의 반발과 자신의 소신을 절충한 일종의 타협책으로 볼 수 있다.그의 신사 참배는 애초 일본유족회에 "8월15일 공식참배하겠다"고 약속했던 데 비하면 참배 형식과 날짜에서 후퇴했다. 또 참배 계획의 중단을 요구해 온 한중 양국의 요구와도 거리가 있다. 참배를 중단할 경우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손상될 수 있고,15일 참배를 강행할 경우 한중 양국과의 관계 악화를 감수해야 하는 기로에서 중간선을 택한 셈이다. 국내적으로는 최소한 참배 약속을 지켰고,대외적으로는 15일의 참배는 피했다는 점을 내세워 반발을 되도록 줄여 보려는 뜻이다.
이 같은 고민은 참배 직전에 발표된 담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담화와 비슷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면서,두 번 다시 전쟁의 길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 뒤 일본의 평화와 번영의 바탕이 된 영령들의 애도를 위해 참배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발언 철회는 부끄러움을 금하기 어렵지만 국익을 위해 일신을 던지는 총리로서의 직책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고 밝히면서 15일 참배를 요구해온 우익 세력과의 약속 준수 여부에 관심을 가진 국민에게 이해를 구했다.
그는 이날 방명록에 '내각 총리 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라고 서명했으나 참배 후 공식 참배 여부에 대해서는 "굳이 구별할 생각이 없다.총리인 고이즈미가 참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5년 최초의 공식 참배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공식참배의 징표로 헌화료를 공금에서 지출한 것과 달리 이날부터 신사 본전 좌우에 놓인 조화의 '꽃값'을 개인적으로 지출함으로써 사적 참배라는 인상을 남겼다.
또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치고 다시 한번 절하는 '2배 2박 1배'의 신도 의례를 피해 본전 앞에서 한동안 고개를 숙이는 형식을 취했다.일본 정부는 지난 주 각 부처 정무관(차관급) 이상의 신사 참배와 관련한 지침을 내렸는데,이 지침에 따르면 관용차의 이용이나 비서·경호원의 대동,방명록에 직함을 쓰는 것은 괜찮지만 신도 의례를 피하고 참배후 공식 참배로 오해 받을 언행을 삼갈 것을 권했다. 고이즈미의 이날 참배도 이 지침에 따른 것이다
또 참배에 따른 불필요한 위헌 논란을 피하려는 계산도 한 듯하다.정교분리의 헌법 규정상 국가 기관인 총리와 각료,차관 등의 공식적인 종교적 행위가 금지돼 있으며 종교 법인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적인 공사 구분이기는 하지만 한중 양국 정부로서도 사적참배에 대해서는 내놓고 따지기 힘들었던 전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게는 종전 기념일이지만 한중 양국에게는 국경일인 8월 15일에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 부인과 정당화로 인식될 수 있다. 때문에 고이즈미는 15일을 피해 참배함으로써 이 같은 상징성을 희석한 것으로 보인다.
도쿄=황영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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