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 5월 정부가 재벌정책을 일부 완화할 당시 예견됐던 바다. 이 정부가 최대 치적으로 자랑해 온 재벌개혁 체제의 근간이 또다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정부는 ‘더이상의 후퇴는 없다’고 장담했으나 작금의 기류는 영 딴판이다.이제는 오히려 정부와 여당이 앞장서서 재벌 주장을 끌어안기에 바쁜 모습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규제완화가 시급하다는 명분을 대고 있으니 제법 설득력도 있다.
아직 정책적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 관계자들의공식ㆍ 비공식 발언 기조가 재계의 주장과 점점 더 큰 공명(共鳴)을 일으키는 최근의 전개상황을 보면 그 정체가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재계는 출자총액제한 및 부채비율 적용의 일부 예외를 인정한 지난번 조치가 미흡하니 보다 큰 폭의 완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 장단을 맞춰 정부와 정치권이 여러 경로를 통해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령‘부채비율 200%’ 규제를 부실기업에만 적용해야 한다거나, 총액출자제의 예외인정 폭을 크게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리낌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사실 이것은 말이 좋아 ‘제도개선’이지, 저의는 ‘제도 철폐’에 있음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물론 재벌개혁 제도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재계의 주장에 나름대로 일리가 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30대 기업집단 지정제 같은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분명히 낙후한 측면이 있다. 그야말로 행정 편의적이고 관료 자의적인 규제라면 하시라도 개폐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환란의 교훈 속에서 국민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재벌정책이 과연 그런 부류인지 따져봐야 한다.
어떤 정책이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하나의 제도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적지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비록 얼마의 부작용을 유발하는 제도라도 그것을 존중하고 지켜 나가려 하는 노력에서 나라의 경쟁력이 함양되는것이다. 지난 수삼년간 대내외 경제 환경에 변화가 있었겠지만 크게 근본이 바뀐 것은 없다. 재벌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이를 놓고 급기야 정부 부처끼리 공방까지 벌이는 판국이니 도대체 국민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 헷갈린다. 지금 과천에서 열리고 있는 경제협의회에서 오랜만에 머리를 맞댄 정치권 당국자들이 먼저 ‘초심’을 되찾아야 하리라 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