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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32)중국 신유학의 전개와 외래종교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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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32)중국 신유학의 전개와 외래종교의 수용

입력
2001.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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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텐안먼광장을 가로질러 동서로 길게 뻗은 장안대가(長安大街)의 동단근처에, 1442년에 세워진 고관상대(古觀象臺) 건물이 서 있다.그것은 서양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대장으로 있던 ‘명ㆍ청관상대’였다. 베이징대학 뒷편에는 베르사유궁을 축소한 바로크양식의 건축물로 구성되었던 청나라의 여름별궁 원명원(圓明園)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예수회 선교사가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은 천문학자, 지도제작자, 조각가, 건축가로서명ㆍ청시대 황제에게 봉사하였던 기술자였을뿐 성직자가 아니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할만한 일이란 그것 외에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통을 충실히 부활한 명대(1368-1644) 276년간은 인류역사상 정치질서가 잘 유지되고 사회가 안정되었던 시기의 하나였다.

평균 1억 정도의 인구가 비교적 평화스럽게 살았다. 명제국이 이룩한 이 안정의신화는 이민족이 세운 청대(1644-1912) 267년 동안에도 근본적인 변화없이 계속 유지되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이 놀랄만한 안정이 유지되었던 바로 그 시기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신세계’로의 팽창, 뒤를 이어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등 실로 역동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은 전 세계를 삼켜버릴 듯이 소용돌이치는 서방 역사의 급류 바깥에 항상 남아 있었다. 이 긴 기간동안 중국인들이 향유한 고도의 정치적 사회적정신적 안정은 같은 시기 유럽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혼란보다 현상적으로 더 나은 것일지 모르지만, 그 혼란을 수습한 서양의 강습 앞에 19세기 중국은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이란 국가적 수치는 아닐지라도 흔히 역사적 비극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다. 안정은 ‘불변’ 혹은 ‘정체’의 또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정된 사회를유지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외국인들로 하여금 중국은 언제나 ‘불변’이라는 신화를 갖게 하는데 기여한 것이 바로 전통 유가사상의 재생품인 신유학(性理學)이었다.

신유학이 강조하는 다섯 가지 인간관계(五倫) 대부분은권위와 복종의 관계였다. 군주의 권위는 아버지의 권위처럼 생래적인 것이고 윤리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후세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초안정시스템’을구축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전통적인 유가사상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된 것은 두 개의 요인이 있다.하나는 북방 이적과의 싸움에서 오랫동안 실패함으로써 중국인들의 시선이 안으로 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요인은 과거제도가 정착되고 관료제도가확립되어 감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 정치이상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런 사상적 기조를 학문적으로 대성시킨 자가 바로 주자(朱子)였다. 사대부의내면적인 실천윤리와 정치적 사명감을 고취시킨 신유학은 관념론일 뿐만 아니라 그 관념론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3세기까지 중국이 성취하였던 정치적 사회적 지적 요소들이 응결된 이 사상은 외부로부터 육중한 타격이 가해진 19세기말에 이를 때까지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을정도로 견고하였다.

16세기 중국을 다녀 간 어느 신부는 “중국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통용되지 않는다. 학문에서의 새로운 견해도 신문물에 대한 접촉도 곧장 제지되었으며 법률로서 그 전파를 막았다”고술회하였다.

명 중기 이후 출현한 양명학(陽明學) 역시 기존의 신유학적 질서에 상당한 도전과 충격을 던지기는 했으며이후 지식인 사회에 상당한 반향과 새로운 지적 전환의 가능성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신유학처럼 전국적인 파장과 강도를 체현함에 있어서 한계를지니고 있었다.

송대 이후 중국에는 많은 외래 종교가 문을 두드렸다. 자기의 문물에 집착하지않았던 원대에는 특히 많은 종교가 신봉되었다.

몽골인들은 이슬람(回敎)과 네스토리우스교(景敎)를 믿었다. 몽골인의 마음을 특히 매혹시킨 것은 티베트에서발달한, 불교가 변질된 형태인 라마교였다.

원나라 치하의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 경교와 회교 등의 종교기관이 유교의 그것처럼 모두 면세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종교가 동시에 성장한다는 것은 유교측으로 볼 때 명백한 퇴보로 보였다. 외래종교를 보호하는 몽골인들의 태도는 중국 학인 계층의 적대감을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명대 이후 외래 종교에 대한 태도로 고착되었다.

가톨릭이 중국에 처음 전래된 것은 원나라 때이지만 외래 종교로서 수용된것은 16세기 중엽 명나라 말 예수회의 도래였다.

초기 신부들은 중국인 신자를 확보하면 성명부터 습관 복장까지 모두 유럽풍으로 고치도록 강요하였다.

화이사상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이렇게 그들의 긍지를 버리도록 하는 방식은 실로 무모한 것이었다. 이런 때에 중국에 온 자가 바로 마테오 리치였다.

그는 중국인 신자를 유럽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신부가 중국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마두(利馬竇)라 개명하고 유자의 옷을 입었다.영락없이 '서유(西儒)'였다. 가톨릭 교의를 유교에 부회하여 중국풍으로 고쳤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에게 ‘기억의 궁전’을짓는 법을 가르쳤다. 먼저 상류계층의 정예분자를 매료시키려 했다.

설교 대신 학자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프리즘과 시계등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아담 샬은 또 1636년 만주인을 격퇴하기 위해 주물공장을 세워 약 20문의 대포를 제작했다.또 천문학적 지식을 중국의 역법 개정에 적용시킴으로서 그들 자신이 상당히 쓸모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렸다.

1610년 일식을 예측하면서 당시북경의 천문대에서 근무하던 중국 천문학자는 몇 시간의 착오를 범하였다. 이러한 실책은 예수회원들에게 다시없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644년 청은명을 멸망시킨 후 아담 샬을 천문대장으로 계속 임용했다. 서양의 종교보다 서양의 기술이 더 쉽게 수용된 것이다.

명말 중국의 지식인이 받아서 이해하고또 수용한 것은 가톨릭이 아니라 중국화한 천주교였던 것이다.

강희제의 긴 치세기간(1662-1722) 가운데 20~30년간은 베이징에서예수회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시기였다.

리치가 거둔 성공은 그가 죽은 후 그 후계자들이 신자들에게 보다 엄격하게 천주교적일 것을 요구하면서파탄이 예고되었다.

청나라에 들어 신부들 사이에 포교방침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이것이 전례논쟁(典禮論爭)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전례논쟁은 중국에있던 여러 수도원과 선교단체들끼리, 혹은 그들과 유럽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1세기동안(1640-1742)이나 들끓었으며 결국은 교황과 청조황제 사이의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1722년부터 옹정제(雍正帝)는 중국의 예수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724년 옹정제는 아버지(康熙帝)의예수교 금지 성유(聖諭)에다 그것을 이단적 종파로 규탄하는 주석을 덧붙였으며 이는 1세기 이상이나 청의 기본적인 정책으로 남게 되었다.

서양종교의 중국에서의 파국은 약간의 성공 후에 서둘러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던 포교상의 과오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14세기 중엽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은 그들만의 전통적인 것만을 고수하는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베이하이공원 바이타- 달라이라마 방문 기념 35m 대형탑

중국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중국에 유입된 외래종교의 흔적을 가장 쉽게 볼수 있는 곳이 베이징(北京)중심부 베이하이(北海)공원의 바이타(白塔)이다.

바이타는 높이만도 35.9㎙에 이르는, 라마교 양식의 대형 탑으로 공원안인공섬 충다오(瓊島)의 산꼭대기에 우뚝 솟아있다. 이 때문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이 탑에 눈길을 보내면서 공원의 상징물로 받아들인다.

이 탑은 청나라때인 1651년,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베이징 방문을 기념하기위해세워졌는데 훗날 지진으로 무너져 다시 건설했다.

복발(바루를 엎은 모양)식 탑신이나 우산 모양의 덮개, 그 옆으로 매달려있는 14개의 구리종,그리고 금으로 도금한 탑의 꼭대기 등은 중화 문명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정면으로는 문이 나있는데 들어가면 티베트어주문이 새겨져 있다.

바이타는 중간 높이까지 계단이 나있으며 그곳에 올라가면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자금성을 비롯한 베이징의 주요 건물과 시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때문에 관광객들은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려가며 탑에올라간 뒤 멀리 보이는 베이징 시내를 배경삼아 일제히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바이타가 있는 베이하이공원은 면적만도 72만㎢에 이르는 대형 공원으로 중하이(中海)난하이(南海) 등의 호수와 연결돼있다.

10세기 초 요나라때부터 건설을 시작했으며 특히 원은 이곳을 중심으로 대도(大都)성을 쌓고 상도(上都)와함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이곳은 명ㆍ청대를 거치면서 왕실의 정원으로 사용됐으며 1925년 공원으로 꾸며져 일반에 공개됐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공원의 호수에서 보트를 타면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이 많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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